

변명에도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변명이 먹히지 않으면 선동(煽動)으로 모습을 바꿉니다. 변명이 내 마음을 가리는 행위라면 선동은 남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려는 시도로 이해합니다. 변명이 이미 일어난 일에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면 선동은 적극적으로 미리 일을 꾸미는 겁니다. 선동은 화려합니다. 누구도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올바른 가치’를 내세웁니다. 모습이 그러하니 선동가의 마음은 쉽게 읽히지 않습니다. 혹시 나쁜 마음으로 사람들을 부추겨서 이용하려는 것인가? 그런 의문이 들어도 헛갈리고 혼란스럽습니다. 애를 쓰면서 깊게 오래 생각해야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이 직접 손을 대지 않고 여론을 조성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면? 선동입니다. 생각을 이리저리 할 수밖에 없으니 머리 아픈 일입니다.
생각하는 방식을 성향에 따라 둘로 나누면, 어떤 사람들은 오래 깊게 생각해서 결론을 내립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다가는 마음이 어수선하고 복잡해져서 빨리 결론을 내립니다. 학술적으로 풀어내면 ‘인지적 욕구’가 높은 유형 그리고 낮은 유형입니다. 오해하시지 말 것은, 인지능력 자체의 높낮이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선동에 한정하면 인지적 욕구가 높아야 쉽게 넘어가지 않고 숨은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선동가는 자신의 마음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연결해 부추기려고 끈질기게 노력합니다. 아무리 엉뚱한 이야기도 반복되면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런 방식으로 투자 대비 효과를 높입니다. 선동의 본질은 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납니다. 제대로 정보가 제공된 논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감성적인 호소로 가려서 실체를 못 보도록 방해합니다. 개인이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할 기회를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움직여서 막습니다. 사리에 맞고 온당한 합리성의 힘을 침식합니다. 공격하려는 대상의 이미지를 사람들이 크게 비판할 수밖에 없는 나쁜 틀 속에 가두려고 전력을 기울입니다. 악평, 비방, 중상은 물론이고 인신공격도 퍼붓습니다. 선동가는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같이 논의하려고 하지 않고 밀어냅니다. 이성적 논의와 공감을 공유하는 것보다는 두려움과 같은 감성에 호소해야 유리하다는 타산에 매우 밝습니다. 선동가는 깊은 생각을 몰아낸 자리를 환호와 갈채로 덮으면서 만면에 미소를 띱니다.
선동가의 마음을 읽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해서 인정사정없이 행동으로 옮겨도 그 사람의 주장을 살짝 뒤집으면 본질이 환하게 보입니다. 정의를 소리 높여 외친다면 스스로 정의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선동가는 인지적 욕구가 높은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은 임금님’일 뿐입니다. 위기감을 느낀 선동가는 급한 마음에 더욱더 힘을 써서 선동을 쏟아낼 겁니다. 운동장을 기울여서 자신이 유리한 상황을 차지하려고.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스스로 미끄러질 수 있음을 애써 잊었다면? 세상은 묘하게 돌아갑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