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 춤추는 바당길 너머 작은 섬… 저 기암괴석 못보면 돌아가지 않으리[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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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차귀도와 생이기정길
김대건 신부의 꿈 품어준 차귀도
탄성 절로 나오는 절벽 풍광
해안 트레킹 명소 생이기정길






지난달 30일 개봉한 영화 ‘탄생’에서는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1821∼1846)의 파란만장한 삶이 그려진다. 김 신부는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작은 배를 타고 출발해 풍랑에 표류하다 제주도 차귀도에 도착한다. 제주 최서단에 있는 섬 속의 섬인 차귀도는 깎아지른 해안 절벽과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룬다.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이 있는 용수리 해안에서 차귀도를 바라보며 걷는 ‘생이기정길’은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가 인상적인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가운데 하나다.》

○ 격동의 19세기 동아시아의 탐험가
제주 서쪽 끝 해안을 따라 걷는 올레 12길 중 한 코스인 ‘생이기정(새가 날아다니는 절벽)’ 바당길. 차귀도를 보면서 걷는 
용수리 포구에서 당산봉까지 1.5km 구간으로,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 억새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제주 서쪽 끝 해안을 따라 걷는 올레 12길 중 한 코스인 ‘생이기정(새가 날아다니는 절벽)’ 바당길. 차귀도를 보면서 걷는 용수리 포구에서 당산봉까지 1.5km 구간으로,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 억새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길이 없다고요? 길은 걸어가면 뒤에 생기는 것입니다.” “바다라는 게 모르면 공포의 대상이지만, 알면 길이 되어 주기도 합니다.”

영화 ‘탄생’에서 성 김대건은 최초의 조선인 가톨릭 신부이자 순교 성인이라는 틀에서만 조명되지 않는다. 그는 한국인 최초로 서양 학문을 배우기 위해 유학한 학생이며, 5개 국어(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 언어 천재였다. 또한 서양의 항해술과 독도법, 측량에 관심 많던 지리학자로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서해를 횡단한 모험가였다. 유교적 신분 질서를 벗어나 평등한 나라를 꿈꾸던 선각자였으며, 19세기 열강의 동아시아 침탈 속에서 조선의 근대화를 꿈꾸었던 국제인이었다. 실제로 그는 옥중에서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세계지리의 개략을 편술했고, 영국이 만든 세계지도를 번역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15세 소년이었던 김대건이 최양업, 최방제 형제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길에 오른 후 25세의 나이에 새남터에서 순교할 때까지, 3574일간 마카오와 필리핀, 청나라와 몽골, 만주, 한반도를 넘나드는 스펙터클한 여정을 보여준다.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에 전시된 파도와 싸우는 라파엘호를 재현한 모형.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에 전시된 파도와 싸우는 라파엘호를 재현한 모형.
그중에서 하이라이트는 바다 장면이다. 김 신부는 제물포에서 길이 7.5m, 너비 2.7m에 불과한 목선을 타고 서해 폭풍우를 뚫고 중국 상하이와 제주를 오간다. 이 배의 이름은 ‘라파엘호’. 구약성서 토빗기에서 토비아의 여행길을 인도한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는 상하이 진자샹(金家巷)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조선인 신자까지 총 13명과 함께 라파엘호를 운항해 조선 잠입을 시도한다. 라파엘호는 28일간의 표류 끝에 제주도 최서단 섬인 죽도(차귀도)에 닿았다. 배 위에서 망원경으로 한라산을 확인한 김대건 신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진다. 이후 라파엘호는 용수리 포구에 정박해 반파된 배를 수리하고, 식량을 얻어 충남 강경 황산포구에 도착한다.

용수성지에 있는 김대건 신부 동상과 기념성당.
용수성지에 있는 김대건 신부 동상과 기념성당.
용수리 포구 주변에는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관이 있다. 입구에는 먼저 갓을 쓴 김대건 신부상이 순례객을 마주한다. 그 뒤로 등대 모양 종탑이 인상적인 기념성당과 배 모양을 형상화한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2008년에 건립된 기념성당의 정면은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하이 진자샹 성당 정면 모습을 재현했고, 지붕은 거센 파도와 맞서 싸우는 라파엘호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성당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에도 김대건 신부가 바다를 헤치고 오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기념관 2층 전시실에는 1845년 9월 28일 김대건 신부 일행이 차귀도에 표착 후 한국에서 첫 번째로 봉헌한 미사를 재현한 모형이 눈길이 끈다. 기념관 옥상 전망대에 오르면 수월봉과 차귀도, 용수포구 등 제주 서북 해안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독수리가 지키고 있는 차귀도
한국인 최초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표착한 차귀도.
한국인 최초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표착한 차귀도.
차귀도란 이름은 고려 16대 임금 예종 때 송나라 복주 출신의 술사 호종단(胡宗旦)의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호종단은 제주에서 중국에 대항할 큰 인물이 날 것을 경계해 제주의 혈맥과 지맥을 끊고 다녔다고 한다. 그가 중국으로 돌아가려 할 때 한라산의 신인 광양당신이 독수리로 변하여 폭풍을 일으켰고, 이에 호종단의 배가 난파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섬의 이름이 ‘돌아가는 것을 막은 섬’이라는 뜻을 가진 차귀도(遮歸島)가 됐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차귀도는 김대건 신부가 타고 돌아온 라파엘호는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그래서 지난해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천주교 제주교구는 김 신부의 표착기념 미사를 차귀도에서 봉헌했다. 차귀도는 1970년대까지 7가구가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래서 섬 곳곳에 집터나 우물이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아 제주도에서 가장 큰 무인도로 남아 있다. 낚시로 유명한 차귀도는 자구내 포구에서 1.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유람선(성인 1만8000원)을 타면 10여 분 만에 도착할 수 있다. 유람선을 타면 섬 안의 억새가 흔들리는 풍경을 둘러보는 데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다. 섬 트레킹 코스 오른쪽에는 한라산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왼쪽엔 푸르게 빛나는 제주의 바다가 펼쳐지는 등대가 있다.

용수리 포구에서 말리고 있는 오징어.
용수리 포구에서 말리고 있는 오징어.
기자가 취재를 갔을 때는 아쉽게도 유람선이 정기 안전점검 중이라 뜨지 않았다. 그래서 차귀도 낚시체험을 할 수 있는 배(1만2000원)를 탔다. 차귀도에 내려 트레킹을 할 수는 없었지만 섬을 한 바퀴 돌면서 장군바위와 독수리바위, 병풍바위, 쌍둥이바위, 와도의 기암절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배 위에서 드론을 띄워 내려다본 차귀도의 본섬(죽도)은 부드러운 언덕이 이어지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본섬 옆에 있는 ‘와도(臥島)’는 사람의 옆얼굴과 입, 치아까지 보일 정도로 영락없이 사람이 누워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눈섬’이라고도 부른다. 곧 날아오를 듯 잔뜩 웅크리고 있는 독수리바위는 호종단의 배를 침몰시킨 바로 그 독수리의 형상이다. 사진 찍느라 정신없는 차에 옆에서 낚시를 하던 체험객이 70∼80cm 정도의 큼지막한 자연산 광어를 낚았다. 물 반 고기 반이라는 차귀도 갯바위에 왜 그렇게 많은 낚시꾼들이 서 있는지 실감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새가 날아다니는 절벽, 생이기정길

차귀도에서 돌아온 후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관이 있는 용수리 포구에서 당산봉 방향으로 해안길을 걸었다. 그 유명한 ‘생이기정길’이자 제주올레길 12코스이자 성김대건해안길에도 포함되는 구간이다. 안내 표지에는 ‘겨울철새의 낙원으로 가마우지, 재갈매기, 갈매기 등이 떼 지어 산다’고 돼 있다.

용암이 굳어진 기암절벽인 생이기정은 제주어로 새를 뜻하는 ‘생이’와 절벽을 뜻하는 ‘기정’이 합쳐진 말이다. 한마디로 ‘새가 날아다니는 절벽길’이라는 뜻이다. 부서지는 파도 소리, 새소리,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흔들리는 억새의 물결은 절벽 너머 보이는 차귀도와 와도의 풍광이 어우러져 인생 샷을 건질 만한 풍경이 펼쳐진다.

당산봉을 형성한 화산재와 용암의 분출로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해안 절벽이 신비로운 생이기정.
당산봉을 형성한 화산재와 용암의 분출로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해안 절벽이 신비로운 생이기정.
생이기정길(약 1.5km)에는 용암이 다시 분출해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해안절벽이 있다. 길을 걷다가 뒤돌아보면 차귀도가 각도에 따라 다섯 개로도 보이고, 여섯 개로도 보인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제주도의 오륙도’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국적 경치에 취한 순간 외국인 순례객들이 앞서 걸어간다. 포르투갈에서 출발해 대서양 해안길을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길이다.

검은 현무암이 평평히 쪼개진 해안을 넘어 언덕에 오르면 작은 만이 나온다. 생이기정 밑의 바닷물이 옥빛이다. 이 만을 향해 의자가 두 개 놓여 있는데, 차귀도로 떨어지는 낙조를 감상하는 숨은 명소다. 당산봉 정상까지 경치를 충분히 감상하면서도 30분 정도면 오를 수 있다.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 서면 북쪽으로는 신창 풍차해안도로가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수월봉, 산방산까지의 푸른 해안이 한눈에 펼쳐진다.


글·사진 제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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