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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수많은 껍데기를 깨듯 거듭나며 ‘다름’을 조각한 예술가[영감 한 스푼]

입력 2022-11-29 03:00업데이트 2022-11-2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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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주년 맞은 조각가 문신
작업실에서 사다리에 올라 대형 석고 원형을 제작하고 있는 조각가 문신. 문신은 작품을 제작할 때 정해진 형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반복적으로 다듬는 동작에 몰입하는 과정을 거쳐 형태를 완성해 나갔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작업실에서 사다리에 올라 대형 석고 원형을 제작하고 있는 조각가 문신. 문신은 작품을 제작할 때 정해진 형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반복적으로 다듬는 동작에 몰입하는 과정을 거쳐 형태를 완성해 나갔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김민 국제부 기자
김민 국제부 기자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도 못 갔지만 그림을 배우겠다며 1930년대에 일본으로 밀항한 예술가가 있습니다. 당시 나이 16세. 고학을 하는 동안 영화 간판 그리기, 구두닦이, 시체 꿰매기, 산부인과 조수 등 온갖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은 그는 아버지에게 500원을 보내며 고향집 뒷산 땅을 사라고 말씀드립니다.

약 50년 뒤 이 예술가는 그 땅에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짓고 자신의 작품과 미술관을 국가에 기부합니다. 이 예술가는 바로 문신(1922∼1994)입니다. 무일푼으로 출발해 자신만의 ‘예술의 전당’을 일궈낸 예술가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문신 회고전에서 그 답을 찾아봤습니다.
기이한 생명체 같은 조각
1985년 작품 ‘개미’. 개미 시리즈는 초기에는 제목이 없었지만 프랑스 관람객들이 개미를 닮았다고 별명을 붙여주면서 작품 제목이 됐다.1985년 작품 ‘개미’. 개미 시리즈는 초기에는 제목이 없었지만 프랑스 관람객들이 개미를 닮았다고 별명을 붙여주면서 작품 제목이 됐다.
문신의 조각을 처음 보면 ’무슨 모양이지?’ 하는 궁금증이 듭니다. 형태가 단순한 브랑쿠시 조각은 추상임을, 자코메티는 인체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죠. 반면 문신의 조각은 기이한 생명체 같다는 느낌을 자아냅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작품에서 우리가 대칭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작인 ‘개미’나 이건희컬렉션 작품 ‘무제’를 볼까요. ‘개미’는 아슬아슬하게 연결된 여러 원형이 두 발로 선 듯 위로 뻗어 나가고 있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의 ‘무제’ 역시 가운데 축을 중심으로 대칭이 보입니다.

다만 문신의 조각을 제대로 즐기려면 형태를 정의 내리려 하지 말고 그 선과 모양에 집중하길 권합니다. 즉, ‘개미’ 작품을 곤충을 표현했다고 결론짓기 전에 선입견을 걷어내고 그 자체를 깊이 감상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개미’ 작품은 뿔처럼 솟은 형상의 좌우가 미묘하게 다릅니다. ‘무제’도 왼쪽이 조금 더 솟아있죠. 작가는 생전에 이 ‘다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소 등에 파리가 붙으면 꼬리를 치는데 양쪽을 고루 치지 않습니다. 한쪽만 이렇게 턱턱 치면 마찰이 생기고 한쪽만 닳아요. … 생명체는 처음엔 똑같지만 움직이는 방향과 습관에 따라 그 모양을 조금씩 바꿔 나갑니다.”





이 “같은 시작점에서 다른 모양을 만든 습관”은 작가의 삶도 바꿔 나갔습니다.
개미처럼 꾸준하게 돌파한 한계들
인간 문신의 삶은 소가 꼬리로 등을 치듯, 개미가 조금씩 흙을 갉아내듯 작은 움직임을 끈질기게 이어가며 스스로를 증명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어릴 때 겪었던 어머니와의 이별도 작용했습니다.

문신은 1922년 일본 규슈 사가현의 탄광촌에서 조선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927년 가족은 고향 마산으로 돌아오지만 어머니는 얼마 뒤 일본으로 떠나버립니다. 21세 무렵 수소문 끝에 외가를 찾아가지만 일본인 외할머니의 냉대로 끝내 모친을 만나지 못합니다. 이때를 계기로 그는 인간은 혼자임을 철저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기댈 곳이 없음을 인식하면 주저앉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신은 벽이 생길 때마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어릴 적 극장 간판을 그리며 돈을 번 다음에는 일본으로 밀항해 정식 미술 교육을 받았죠. 한국 화단에서 자신을 증명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뒤에는 프랑스로 무작정 떠납니다.

1961년 50달러를 들고 간 파리에서 문신은 “프랑스어도 하나 모르고 유학길에 떠났고, 기거할 곳도 없어 무척 고생했다”며 “너무 절망스러워 센 강변에서 자살도 생각했다”고 회고합니다. 그러다 우연히 파리 근교의 오래된 성을 수리하는 일을 맡게 되고, 3년 동안 목수와 석공 일을 하며 조각가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했죠. 그 후 1970년 13m 대형 조각품 ‘태양의 인간’을 제작하며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오릅니다.
아브락사스가 깨고 나온 삶의 껍데기
이런 그의 삶의 과정은 작품 속에도 여실히 담겨 있습니다. 내 앞에 펼쳐진 길이 없어도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는 모습이 꼭 기이한 생명체 같은 조각 작품을 닮았습니다. 사회가 나를 예술가라고, 엄마가 나를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를 증명해 갔던 시간. 그 힘든 상황 속에서 깨고 나온 삶의 껍데기들이 꼭 그가 남긴 작품 같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는 한 인간이 태어나 끊임없이 거듭나며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아브락사스는 알을 깨고 나온다’라고 표현합니다. 문신 작가는 어머니의 세계, 마산의 세계, 한국의 세계를 차례로 깨고 나오면서 거듭났던 것이죠. 그리고 그 과정은 거창한 무언가가 아닌, 매일 주어진 상황을 치열하게 살아내고 길을 찾는 습관들임을 작품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막 걷기 시작한 아기들은 1시간 동안 2368보를 내딛고, 최소 17번을 넘어진다고 합니다. 완벽한 걸음을 몸이 터득할 때까지 무수히 발을 내딛고 실패하는 과정을 반복한다는 이야기죠. 이러한 끈질긴 시행착오로 평생 삶을 갈고닦는다면 그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문신의 작품에서 이런 인생의 아름다운 흔적들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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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국제부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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