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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이제는 웃으리”… 쪽방촌 사람들의 ‘희망 노래’

입력 2022-11-29 03:00업데이트 2022-11-2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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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책‘ 펴낸 쪽방촌 주민 8명
처음엔 글쓰기 손사래 쳤던 주민들, 노경실 작가 격려에 마음의 문 열어
부모에게 버림받고 술에 의존했던 절절한 인생 여정 하나둘 털어놔
“따스한 쪽방촌… 내 인생도 꽃필듯”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 주민들을 최선관 서울특별시립 돈의동쪽방상담소 행정실장이 그린 그림. 골목에서 한 주민이 환하게 웃고 
있다. 다른 주민은 어릴 적부터 노동에 시달렸던 슬픈 과거를 털어놓았고, 또 다른 주민은 알코올의존증에 빠졌던 시절을 
고백한다(왼쪽부터). 서울특별시립 돈의동쪽방상담소 제공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 주민들을 최선관 서울특별시립 돈의동쪽방상담소 행정실장이 그린 그림. 골목에서 한 주민이 환하게 웃고 있다. 다른 주민은 어릴 적부터 노동에 시달렸던 슬픈 과거를 털어놓았고, 또 다른 주민은 알코올의존증에 빠졌던 시절을 고백한다(왼쪽부터). 서울특별시립 돈의동쪽방상담소 제공
노경실 작가노경실 작가
“여러분의 삶이 보잘것없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실은 하나하나가 소중합니다.”

노경실 동화작가(63)는 올해 4월 7일 서울 종로구 ‘쪽방촌’에 사는 주민 8명을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고 한다. 60, 70대인 주민들은 하나같이 삶의 거친 굴곡을 지나온 이들. 장애를 지녔거나 기초생활수급자인 사람도 있었다.

그런 주민들에게 노 작가가 권한 건 ‘글쓰기’였다. 노 작가는 “글 쓰는 게 어렵게 느껴지면 그냥 말로 인생을 얘기해보라”고 했다. 처음엔 손사래를 치던 주민들도 만남이 늘어가며 조금씩 변해갔다. 타인과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자신감이 없던 한 주민은 용기를 내 글자를 써내려갔다. 글을 모르던 한 어르신도 찬찬히 입을 열고 자신의 과거를 들려줬다.

서울 종로구 쪽방촌 주민 8명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우리들의 인생 책’. 서울특별시립 돈의동쪽방상담소 제공서울 종로구 쪽방촌 주민 8명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우리들의 인생 책’. 서울특별시립 돈의동쪽방상담소 제공
15일 출간된 그림에세이집 ‘우리들의 인생 책’(서울특별시립 돈의동쪽방상담소)은 4월부터 10월까지 쪽방촌 주민 8명이 노 작가의 도움을 받아 쓴 책이다. 최선관 돈의동쪽방상담소 행정실장이 현대엔지니어링의 후원을 받아 노 작가에게 글쓰기 강의를 부탁해 진행된 프로젝트였다. 노 작가는 23일 통화에서 “처음엔 마음을 열지 못하던 주민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한번 써보라고 하자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분들은 고통스러운 과거를 돌아보는 게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엔 모두 아름다운 뜻이 담겨 있잖아요. 그걸 깨달으면 인생을 돌아볼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아요. 차분히 기다렸더니 하나둘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았어요.”

‘우리들의 인생 책’엔 그런 주민들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주민 A 씨는 결혼해 가정을 꾸렸던 40대까진 행복했지만, 50대부터 불행이 시작됐다고 한다. 그는 자세한 얘기를 꺼리면서도 “돌아보면 쓴웃음이 난다”며 시 한 편을 지었다.



‘지나온 과거를 묻지 마세요/흘러간 세월에 눈물짓지 마/서러운 시간 속에 이슬이/지내온 과거를 이제는/떨쳐버리고 웃으리.’(시 ‘내 인생의 노래’ 중)

어렵사리 슬픔을 마주한 이도 있었다. 주민 B 씨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손가락 하나도 작두에 잘려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왔다. 스물네 살에 시집갔지만 남편은 노름에 빠져 재산을 탕진했다. 빚에 시달리다가 아이를 데리고 도망친 뒤 홀로 식당 일을 하며 아이를 키웠다. 모아둔 돈도 집도 없어 여기까지 흘러들었다. 하지만 B 씨는 “그럼에도 희망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돈의동 쪽방촌은 정이 넘치고 따스함이 있다. 가족에게서도 받지 못한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내 인생도 활짝 꽃이 필 것 같다.’(에세이 ‘돈의동과 나, 나의 돈의동’ 중)

친부모에게 버려진 뒤 오래도록 방황한 C 씨. 그는 동물에게 받았던 기억을 발판 삼아 동물들을 돌보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몰락한 집안 사정에 절망했던 D 씨는 “앞으로 더 많이 나누고 더 많이 품어주며 살겠다”고 노래했다. 알코올의존증에 빠졌던 과거를 털어놓은 이도, 떠나간 부인에게 사죄의 글을 실은 이도 있다.

이제 어엿한 저자가 된 주민 E 씨에게 25일 전화를 걸었다. 프로젝트 이전만 해도 사람을 꺼렸다는 그는 차분하게 책을 펴낸 소감을 말했다.

“글 쓰는 동안, 방에 있는 작은 거울에 제 과거가 비치더군요. 거울 속에 있는 제 모습은 삶의 희비(喜悲)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남은 인생은 웃으면서 살고 싶습니다. 이젠 그래도 되지 않을까요.”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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