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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32년 영업맨의 성공신화…“이젠 ‘남아공 스토리’ 향해 강펀치”[서영아의 100세 카페]

입력 2022-01-22 03:00업데이트 2022-01-23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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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생 2막]삼성전자 윤성혁 고문의 도전
삼성의 현장 경영 철학을 책으로… 영업현장 최전선의 기록들 담아
은퇴후 마음 정리하며 1년만에 퇴고… 남아공 법인장때 한 가수와 인연
복싱경기 출전 약속후 매일 구슬땀… 4년 열정 남아공에 공헌할 길 찾아
서울에서 점심과 저녁 약속을 모두 잡았다는 14일 오후, 광화문 인근에서 윤성혁 고문을 만났다. 그는 청계천을 배경으로 요즘 푹 빠져 지낸다는 복싱 포즈를 취해 보였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윤성혁 삼성전자 고문(60)은 32년간 삼성전자 글로벌 영업의 최전선을 누볐다. 도합 세 차례 16년간 미국에서 일하는 동안 삼성 TV는 사상 최초로 소니를 뛰어넘어 세계 1등이 됐고 미국에서 삼성폰이 아이폰의 아성을 뚫고 판매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퇴직 4년 전부터는 삼성 아프리카 총괄 겸 남아프리카공화국 법인장을 맡아 저조하던 실적을 몰라보게 끌어올렸다. 그리고 이 모든 ‘흥분과 도전’의 시간들은 2020년 12월 어느 날, 본사에서 걸려온 국제전화 한 통으로 막을 내렸다.

○‘현문현답―현장에 문제가 있고 현장에 답이 있다’

그로부터 딱 1년 만인 지난해 말, 그는 책 한 권을 냈다. ‘위기인가? 삼성하라!’(봄빛서원)란 제목이다. 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부터 물었다.

“삼성이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한 과정을 쓴 책은 많지만 해외 영업 현장 최전선의 기록들은 찾기 어려웠습니다. 제게 많은 가르침을 준 선배들의 얘기도 별로 알려진 게 없더군요. 이들이 위기를 어떻게 돌파해냈는지, 삼성, 나아가 한국이라는 브랜드를 세우기 위해 어떻게 헌신했고 그 과정에서 후배들을 어떻게 잘 이끌어줬는지 남기고 싶었습니다. 밖에 알려진 삼성의 모습 말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쓴 많은 노력들을 조명해보고 싶었지요. 제목을 직설적으로 붙인다면 ‘세계를 개척한 삼성의 영업비밀’쯤 됐을까요.”

―그 비밀이 뭔가요.

“미국에서 협업했던 IBM 동료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당신 회사는 문제가 생겼을 때 누가 잘못했는지 따지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달려들어 대책 수립에 집중하더라’고. 그게 삼성 영업의 힘입니다. 삼성 영업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현장 경영의 철학이 있습니다. ‘현문현답, 즉 현장에 문제가 있고, 현장에 답이 있다’는 것이죠. 실제로 조직이 잘되려면 아래와 위가 수레바퀴 돌아가듯 잘 연결돼 움직여야 합니다. 특히 조직에서는 뭔가 이상할 때 ‘워닝’(경고)해주는 역할이 중요합니다. 영업이 그 역할을 하죠. 다만 위에서 그 워닝을 알아채고 캐치하는 사람이 있어야 손바닥이 마주칠 수 있죠.”

○복싱 도장 등록부터 시작한 인생 2막

2020년 말 귀국해 부인의 학교가 있는 세종시에 정착했다. 11년간의 임원 이력에 종지부를 찍고 2년간의 ‘고문’ 직함을 얻었다. 우선 귀국 다음 날(정확히는 2주간의 자가 격리를 마친 다음 날) 집 근처 복싱도장에 등록했다. 한 남아공 가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아들처럼 그를 따르는 남아공의 인기 래퍼 ‘캐스퍼’가 셀리브리티 스포츠의 일환으로 라이벌과 복싱 경기를 할 예정인데, 그 사전 경기에서 은퇴한 남아공 챔피언을 상대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그때를 대비해 최소한의 체면을 세우고자 복싱을 배우는 것. 스파링을 하며 복싱과 영업의 닮은 점을 생각한다. 뱃살이 빠지고 몸이 가벼워진 건 덤이다. 그리고 귀국 비행기에서 구상한 자신의 32년을 총괄하는 책 쓰기에 착수했다. 당시 삼성 아프리카 판매망은 만년 적자에서 벗어나 처음 이익을 내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우고 있었다.

“남아공을 떠나던 날. 호텔까지 찾아온 직원들이 눈물 흘리며 ‘당신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아프리카를,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책으로 써 달라’고 말해 왔어요. 술 마시면서 제가 말해준 일화를 반드시 넣으라는 조언도 있었지요.”

1년간 그의 일상은 아침에 일어나 밥 짓고 커피 내리고 부인을 깨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부인이 학교에 나가면 복싱 도장까지 1.6km를 뛰어간다. 1시간 반 동안 줄넘기와 섀도복싱, 스파링을 하며 땀을 흘리고 돌아와 간단히 점심을 한 뒤 책 쓰기에 매달렸다.

○끊겼던 인맥과 가족의 복원

2018년 윤성혁 고문이 킬리만자로 정상에 올랐을 때의 기념 컷. 고산병으로 죽을 고생을 했지만 등정은 인생길과 닮았다고 새록새록 느꼈다고 한다. 윤성혁 제공
“책을 쓴 건 너무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의 기억을 다 쏟아내고, 그걸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엮는 방법을 고민하고 읽기 쉽게 글을 다듬고…. 하다 보니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이 많더군요. 마음이 정리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미래 윤곽도 잡혔습니다. 처음엔 500쪽 분량을 썼고 다섯 번 다시 썼습니다. 첫 원고와 비교하면 제 글 쓰는 기술도 늘었죠.”

그렇게 1년간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다.

“사실 빨리 어디라도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냐는 초조함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주변에선 중국 업체 입사를 권하기도 하고 삼성 관련 일을 찾아보라거나 대학 연구교수 자리를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 약속을 지키는 게 더 중요했습니다.”

―연말에 책이 나왔는데 반응은….

“선배들은 ‘너 필력 대단하다. 언제 이런 걸 준비했냐’고. 저를 그저 은퇴한 회사원으로만 알던 권투 도장 분들로부터도 인사를 많이 받았어요. ‘삼성에 대한 이미지가 180도 바뀌었다’는 얘기들을 하세요. 약간의 ‘갑’ 이미지도 있었는데 이렇게 열심히, 힘들게 ‘을’처럼 일했느냐고….”

페이스북에 한글과 영어로 책 발간 소식을 올렸더니 미국과 남아공의 옛 동료들이 200여 개의 댓글을 달았다. 특히 남아공에서는 영어로 번역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인세 수입은 전액 넬슨만델라재단에 기부하기로 했다.

지난 1년은 ‘자유인’으로서 인간관계를 복원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평생 이렇게 많은 시간을 아내와 둘이 보낸 적이 없어요. 무척 행복합니다. 20년간 해외생활로 소원했던 친구들과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어색해도 20, 30년 만에 친구들에게 연락해 보니 각계각층에서 중요한 일을 한 친구들이 무척 많아요. 원자력발전, 수소발전, 투자 자산운용 하는 친구까지 골고루 있어요. 이 점(點)들을 연결하면 뭔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마지막 근무지 남아공에 공헌할 길 찾아

―앞으로의 계획은….

“4년간 열정을 쏟아부은 남아공에 공헌할 방법을 궁리 중입니다. 한국에는 남아공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특히 아프리카에 관계망을 가진 사람은 드물죠. 정부 고위층과 실무진과의 친분을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건 굉장한 자산인데요. 중국이나 일본이라면 당장 모셔갈 텐데요.

“남아공의 심각한 전력난을 좀 해결해 보려고요. 한국에는 원자력발전 기술이 있어요. 소형모듈원전(SMR)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남아공에서 일하면서 터득한 노하우인데, 제게는 그곳 정부를 설득하고 일이 되게끔 만들 길이 보입니다. 나아가 남아공은 그린수소를 만들 천혜의 환경을 갖추고 있어요. 한국이 필요로 하는 신재생에너지를 값싸게 얻을 수 있죠. 남아공의 환경적 경쟁력과 한국의 원자력, 수소기술력을 조합해서 양국이 ‘윈윈’하는 길을 찾아보자는 구상입니다. 제 나머지 인생을 걸 만큼의 일이라고 봐요.”

―너무 원대해서 조금 걱정되는데요.

“2018년 만델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킬리만자로 등반을 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고산병 탓에 많은 동료들이 중도 포기했지만 끝까지 남은 사람들도 있었죠. 최고봉에 오르려면 여럿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 오르기는 힘들어도 하산은 빠르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누구나 정상에 올라가면 언젠가 내려가야 한다는 것도요. 우후루피크에 올랐을 때 우린 해냈다는 기쁨으로 얼싸안았지만 때가 되어 내려왔지요. 내려오는 발걸음은 가벼웠고, 해볼 만한 싸움에서 이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수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전 지금 또 다른 산을 바라보고 있어요. 구상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생각만 해도 마구 가슴이 뜁니다.”

그는 “아직은 아이디어 단계”라면서도 하루빨리 남아공에 돌아가 사업을 추진할 날을 꿈꾼다. 남아공을 배경으로 펼쳐질 ‘성 윤’의 인생 2막, 그 심장 박동 소리가 전해져올 듯하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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