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다의 진객, 대구[김창일의 갯마을 탐구]〈69〉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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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대구는 신항로 개척의 이등공신쯤 줘도 될 듯하다. 15세기부터 유럽인들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항로를 발견했다. 콜럼버스의 유럽∼아메리카 항로 개척과 마젤란의 세계 일주를 가능케 한 것은 항해술, 지도학, 선박 건조기술 등이었다. 이와 더불어 숨은 역할을 말린 대구가 했다. 건조 대구는 수년간 상하지 않아 뱃사람들의 든든한 식량으로 대항해를 도왔다. 대구가 주요 식량자원이 되자 15세기 북해 어부들은 아이슬란드 남부 바다까지 진출했다. 1970년대 아이슬란드와 영국은 어업권 분쟁으로 ‘대구전쟁’을 치른 뒤 국교 단절까지 했다.

유럽에서 식량자원으로 주목받을 당시 대구는 조선에서도 중요한 물고기였다. 대구를 바치라는 관리들의 요구가 과도하자 함경도 순무어사 김명원은 1568년 올린 장계(狀啓)에서 명천(함경도) 이남 지역에서 대구 공납은 백성들에게 괴로운 일이라 했다. 송시열은 1659년 “함경도 감사의 장계에서 대구를 바치는 일이 민폐가 크다고 하니, 줄여 주십사” 현종에게 건의했다. 흉년과 가뭄으로 백성이 굶어 죽자 숙종은 함경도 갑산에서 잡히는 대구를 진상하지 말고, 그 지역 백성들에게 나눠주게 했다. 대구 공납에 대한 기록이 많은 것은 활용 가치가 높았고, 백성들의 고초가 심했기 때문이다. 대구는 중국과의 교류에 많이 활용됐다. 규합총서(1809년)에 “대구는 동해에서 나고 중국에는 없으므로 그 이름이 문헌에 나타나지 않으나 중국 사람들이 진미로 여긴다”고 했다. 조선 중기 실학자 이수광 역시 “북경 가는 사람들은 대구를 사서 간다”라고 했다.

중국에서 잡히지 않아 ‘조선의 물고기’라 불렸던 대구가 갑자기 서해에서 어획된 시기가 있었다. 17세기 한랭한 날씨가 두드러진 소빙기에 연해주 한류(리만 한류)가 남하하다가 제주도 근해 난류에 막혀 서해로 방향을 틀었는데 이때 따라 올라간 대구가 잡혔다. 이후 대구는 서해 냉수대에 갇혀 토종 대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식 환경이 좋지 않은 얕은 수심에서 제대로 생장할 수 없어 남해에서 잡히는 대구의 절반 정도 크기로 줄었다. 그래서 왜대구(倭大口)라 부른다.

대구잡이 주요 항구는 거제도 외포항, 가덕도 대항항과 진해 용원항이다. 이들 항구는 대구가 지나는 길목인 가덕수로 인근에 있다. 외포항 어민들은 ‘거제 대구’, 대항항과 용원항 어민들은 ‘가덕 대구’ 품질이 최고라며 자랑에 열을 올린다. 산란을 위해 북태평양에서 남해까지 왔다가 같은 바다에서 잡힌 대구의 우열을 가릴 수 있을까마는. 외포항에선 생대구, 건대구는 물론이고 대구탕, 대구회, 대구뽈찜 등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대항항과 용원항 어선이 잡은 대구는 부경신항수협위판장으로 집결된다. 위판장 주변으로 수산시장이 있어 대구 판매점과 대구탕 파는 음식점이 즐비하다. 대구 요리의 백미는 대구탕인데 수컷 정소인 ‘이리’가 진미다. 암컷 대구보다 수컷이 비싼 이유다. 알 밴 대구는 알을 염장해 다시 배 속에 넣어 그늘에 말린 ‘약대구’를 고가에 판매한다.

지금 동해 어디쯤 지나고 있을 대구는 11월 말경 남해에 다다를 것이다. 겨울 바다 진객, 대구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갯마을 탐구#대구#진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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