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허물고 자연과의 소통 택한 건축[임형남·노은주의 혁신을 짓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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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의 ‘판스워스 주택’. 숲 한가운데 놓여 있는 군더더기 없이 네모반듯한 직육면체 유리 덩어리다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의 ‘판스워스 주택’. 숲 한가운데 놓여 있는 군더더기 없이 네모반듯한 직육면체 유리 덩어리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대표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대표
미국인 의사 이디스 판스워스 박사는 1947년 건축가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사진)에게 시카고 근교에 지을 주말주택 설계를 의뢰한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 건축가 미스는 바우하우스 교장을 지낸 능력 있는 건축가이며,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와 더불어 현대건축의 문을 열었던 역사적인 인물이다.

미스는 예전에 무척 인기 있었던 미국 드라마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에 나온 피도 눈물도 없이 엄격한 킹스필드 교수님 같은 인상이다. 그는 독일인 특유의 엄정함을 바탕으로 장식이 많고 고답적인 서양 건축의 전통을 벗어버리고, 현대건축의 방향을 정한 여러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만들어냈다. 이전부터 미스의 전시를 열심히 보았고 그의 건축에 매료되었던 판스워스 박사는 여가를 즐기며 단출하고 우아하게 주말을 보낼 수 있는 집을 지어주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1951년 집이 완성되어 입주했다.

‘판스워스 주택’은 아주 혁신적이었다. 집의 형태는 숲 한가운데 놓여 있는 군더더기 없이 네모반듯한 직육면체 유리 덩어리였다. 하얀색 테두리를 가진 유리 신전 같기도 했다. 철로 짠 얇은 기단의 나무 덱 위로 최소한의 얇은 기둥 외에는 벽이 온통 유리로 된, 막힌 곳이라곤 화장실밖에 없는 특이한 집이었다. 물론 미스가 그동안 추구했던 건축적 실험의 연장선에 있는 형태이긴 했지만, 주택으로 그렇게 투명한 형태를 취한 것은 무척 과격한 디자인이었다. 그리고 그 집은 현대건축의 기념비로 남게 된다. 건축이 자연과 직렬로 연결되는 아주 혁신적인 건축으로.

유기적 건축의 대표작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은 폭포 위에 집을 앉혀 물이 집을 관통한다.
유기적 건축의 대표작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은 폭포 위에 집을 앉혀 물이 집을 관통한다.
자연에 대한 경계를 허무는 것, 말하자면 공간의 투명성을 추구하는 현대건축의 특징은 사실 동양 문화를 접한 서구인의 충격에서 시작되었다. 얼마 전 전남 나주와 경북 경주의 안강에 가서 오래된 살림집을 여러 채 볼 기회가 있었다.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고전들이자 제법 규모가 큰 집들이어서 집마다 넓은 대청이나 누마루 공간이 있었다. 자연이나 마당을 향해 두 팔을 한껏 벌린 것처럼 열린 그 공간들은, 문을 접어서 활짝 열 수 있을 뿐 아니라(분합문) 들어서 하늘에 걸어놓을 수 있는 구조로도 되어 있어서(들어열개문) 마음만 먹으면 자연과 인공 구조물 사이의 벽이 사라지며 바로 접하도록 되어 있었다.

건축은 근본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만드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자연의 혹독한 환경으로부터 안전한 인간의 쉼터를 만드는 것이 건축의 시작이라면, 서양 건축은 그 근본 개념인 경계 만들기를 충실하게 수행하며 발전했다. 그에 비해 동양의 건축은 경계는 있으나 서양 건축에 비해 훨씬 자연을 향해 열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 동양의 자연관은 대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바탕으로 자연과의 조화를 꿈꾸며 자연과 합일하고 싶어 했다. 이와 달리 인간의 이성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자, 결국 인간을 위한 도구로 사고하는 서양의 자연관은 건축에서도 그대로 구현된다.

건물을 구축하는 방법의 차이도 크다. 기둥과 보로 집의 뼈대를 만드는 동양의 건축은 벽에 창을 크게 낼 수도 있고 심지어 벽이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벽식 구조가 주된 공법이었던 서양의 건축은 견고하고 굳건한 벽으로 자연을 막아서며, 자연이 틈입하기 힘든 형식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국민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90년이 넘는 세월을 살면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젊은 시절 만국박람회에서 접한 일본 문화에 무척 감동을 받고 동양의 사고를 서양의 건축에 접목시키면서 독특한 자신만의 건축세계를 만든다. 단절적이고 고립적인 건축이 아니라 자연과 유기적으로 소통하는 건축. 당연한 이야기가 서양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는 처마를 길게 낸 ‘프레리 스타일’이라는 수평적 건축의 형식을 만들었는데, 유럽과는 달리 평원이 많은 미국의 지형에 적합한 건축이다. 1939년, 그의 나이 72세에 완성한 ‘낙수장(落水莊·Fallingwater)’이라는 주택은 라이트의 사고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세계문화유산에까지 등재되었다. 에드거 코프먼이라는 백화점 재벌이 폭포가 있는 경치 좋은 땅에 집을 지어 달라고 의뢰하자, 라이트는 아예 폭포 위에 집을 앉히고 물이 집을 관통하는 아주 획기적인 집을 설계한다.

원래 땅에 있었던 거대한 바위를 건물의 주된 뼈대로 삼고, 보의 한쪽 끝만 고정되고 다른 끝은 받쳐지지 않은 상태로 떠 있게 되는 캔틸레버(cantilever) 공법을 도입했다. 6m가 넘는 캔틸레버는 폭포 위에 둥실 떠 있는 모양으로 건물의 수평성을 돋보이게 한다.

경계를 확장하며 자연으로 뻗어가는 건물, 혹은 생장하는 느낌의 건축을 만들어낸 라이트는 미스와 같은 유럽 건축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사실 ‘낙수장’은 과도한 캔틸레버 구조의 문제가 대두되었고, 극단의 투명성을 보여준 미스의 ‘판스워스 주택’은 기본적인 단열이나 방수, 사생활 보호 등에 대한 대책이 부족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런 기술적인 한계들을 점차 극복해 나가며, 그로부터 현대건축은 자연과 소통하는 건축이라는 새로운 문을 열게 된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대표
#경계#자연과의 소통#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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