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칼럼]등 떠밀려 진입한 옳은 길… 유턴은 안 된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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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회담, 文 대통령 깜짝 변신은
美가 압박하고, 韓은 남북대화 매달린 산물
결국 대만·쿼드 등 美 요구 많이 반영됐지만
결과적으로 文 정권 외교 제자리 찾고 韓美 모두 윈윈
관건은 실행인데 상대따라 말 바꾸거나
지지층 의식해 공동성명 취지 훼손하면 우방 불신만 심화

이기홍 대기자
이기홍 대기자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변신은 대한민국을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앞으로의 실천이다.

한미 공동성명이 내용대로 실행돼 우리 외교의 기본궤도 역할을 하게 될지, 빈 수레 수사(修辭)에 그칠지를 가늠하려면 문 대통령 변신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퀴즈: 문 대통령이 변신한 진짜 이유는?(복수 선택 가능)

①외교노선을 근본 전환키로 결심해서 ②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깨달아서 ③남북관계 운신 폭 확보 위한 전술적·단기적 변신 ④미국의 압도적 협상력에 등 떠밀려서.

외교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봤더니 대부분 ③과 ④가 복합된 것으로 봤다. ②도 일정 부분 섞였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①을 답으로 꼽은, 즉 외교안보관이 환골탈태했을 것으로 보는 전문가는 없었다.

외교소식통에 따르면 이번 공동성명은 미국 측 초안(텍스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물론 초안을 놓고 수주간 강도 높은 협상을 통해 첨삭 과정을 거쳤겠지만, 어느 쪽 초안을 바탕으로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상당히 달라진다.

더구나 미국이 초안을 늦게 제시하는 바람에 밀고 당기기를 충분히 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미국은 일부 대목에 대해선 ‘받든지, 떠나든지’ 택하라는 식으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중국을 겨냥해 비(非)시장경제주의를 비판하는 내용도 요구했으나 이 대목은 물러선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힘에 밀려서든, 한국이 남북관계에 집착해서든 미국의 입장이 반영된 내용이 많았다. 하지만 아이러니는 그렇게 한국이 양보한 것들이 한국에도 유익한 결과라는 점이다.

우리가 내주는 게 귤이고, 미국이 내주는 게 오렌지라 비유해 보자.

쿼드·대만·남중국해 언급, 세계무역기구(WTO) 개혁 등의 대목이 한국이 내준 귤인데 이 정도 수준의 언급도 못 했다면 균형자, 중재자는커녕 모두에게서 무시당했을 것이다.

싱가폴·판문점 선언과 남북대화 내용이 포함된 것은 한국이 얻은 오렌지다.

그런데 싱가폴 대목은 실질적으론 미국으로서도 손해볼 게 없는 양보다. 트럼프의 유물이어서 바이든이 정서적으로 꺼려했을 뿐, 싱가폴 선언의 내용들은 과거부터 미국이 지지해온 아주 원론적인 입장이다. 그 외에 북한에게 줄 선물은 전혀 반영이 안됐다.

미사일은 우리에겐 우주개발 역량 강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지만, 미국으로서도 2017년 탄두중량을 다 풀어준 마당에 사거리 제한을 붙들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동시다발적 정밀타격 기술 이전이 함께 논의됐다면 더 큰 오렌지가 됐을 것이다.

그렇게 주고받은 걸 따져보면 한국이 더 많이 내준 것 같은 모양새다. 하지만 그러니까 손해 본 회담이라고 생각한다면 구시대적 계산법이다.

설령 우리가 귤 7개를 내주고 오렌지 3개를 받았다 해도, 양측이 함께 90개의 멜론을 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우리 기업들의 44조 원 투자를 퍼주기라 표현하지만, 이는 일방적으로 귤을 준 게 아니라 함께 멜론을 얻는 과정이라 보는 게 맞다.

백신 위탁생산, 원전 공동수출 등도 미국이 일방적으로 오렌지를 줬다기 보다는 멜론 창출에 해당한다. 백신, 원전 원천기술을 갖고 있는 미국으로선 한국만큼 가격경쟁력과 품질·시설관리에서 비교우위를 가진 생산 협업 파트너를 찾기 어렵다.

이처럼 한미동맹이 하나 주고 하나 뺏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함께 새로운 이익을 창출하는 윈윈의 동업자 단계로 접어든 것은 우리 기업과 기술 과학 역량의 성장 덕분이다. 안보 동맹이 경제 과학 전방위로 확장 심화되는 이런 거대한 진화과정은 좌파진영도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의 보복에 대한 과도한 우려도 세계 판도의 급변을 간과한 데서 비롯된다. 중국은 최근 1, 2년간 미국과의 정면 대결에서 사실상 참패했다. 사드보복처럼 미중 대결이 본격화하기 전에는 주변국들을 향해 “우리 편에 안 서면 혼쭐날 것”이라고 협박할 수 있었지만, 이젠 “너무 미국 편만 들지는 말아 달라”고 호소해야 할 처지다.

4년간 친중 구애 행보를 보여온 문 대통령도 미국과의 협력 없이는 남북관계와 안보는 물론 경제도 풀어가기 힘든 현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글로벌 공급망 문제를 기업들이 알아서 할 일처럼 방치하다시피해 온 기존의 스탠스와 달리 배터리 반도체 기술 협력의 구체적 내용까지 다 포함해서 언급한 것도 미국 주도 가치동맹에 탑승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인식한 결과일 것이다.

내정에서는 낡은 이념적 아집을 버리지 못해왔지만, 외교는 워낙 거구의 파트너와 이인삼각 달리기를 해야 하니 운신의 폭이 적고, 그 결과 아집을 버리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비록 엉겁결에 의도치 않은 길로 접어들었다 해도 그 길이 옳은 길이고 처음으로 좌우 모두에서 박수를 받게 되면, 그 궤도로 계속 가려 하는 선순환 관성이 생길 수도 있다. 그 방향이 정권 재창출 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라는 전략적 계산도 힘을 실어줄 것이다. 야당이 긴장해야 할 대목이다.

하지만 4년간 여실히 드러난 문 정권의 DNA를 감안하면 유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평소엔 미국 때리기로 재미보다 정상회담 때만 한미동맹 찬가를 부르는, ‘4년 반미, 반짝 친미’는 좌파 정치권의 오래된 습성이다.

만약 중국에 가선 다른 말을 하고, 친문세력 특유의 ‘기발하고 창의적인 해석과 어휘력’으로 한미 공동성명을 다른 버전으로 탈색시켜 버린다면 우방들로부터 불신을 자초하는 자해행위가 될 것이다. 중요한 건 문안 합의가 아니라 실행과 언행일치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한미정상회담#문재인대통령#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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