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수호 사천왕, 신라 호국의 신 되다[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입력 2021-05-25 03:00수정 2021-05-25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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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 목탑 기단에 장식했던 사천왕상의 일부. 틀에 찍어낸 뒤 초벌구이를 하고 다시 유약을 입혀 구워 완성했다(왼쪽 사진). 감은사지의 동탑 사리장엄구(오른쪽 위 사진)와 서탑 사리장엄구. 외함 안에 사리병이 안치된 사리기가 들어 있었다. 국립경주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을 이끈 인물로 김춘추(무열왕)와 김유신을 손꼽지만 문무왕의 역할도 막중했다. 문무왕은 태자 때 수많은 전장을 몸소 누볐고 왕위에 오른 후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했다. 그는 삼한일통(三韓一統)의 대업을 이룬 후에도 외적의 침입을 늘 경계했다. 그러한 경계심이 그의 유명한 유언에 담겼다.

681년 왕은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 전 “짐은 죽은 뒤에 호국의 큰 용이 되어 나라를 수호하고자 한다”라고 유언했고, “운명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니 갑자기 긴 밤으로 돌아간다고 한들 무엇이 한스럽겠는가! 죽고 나서 열흘 뒤에 궁궐의 창고 문밖에서 화장하라!”라는 조서를 남겼다. 왕은 이름만을 남기려 했지만 그의 자취는 지금도 경주 곳곳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

○ 위기감 속에 세운 사천왕사

당나라 군사들과 연합하여 작전을 수행한 바 있는 문무왕은 그들의 야욕을 누구보다도 더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는 서쪽 바닷가에 당나라 군사들이 수시로 출몰하자 특별한 지시를 내린다. ‘낭산 자락에 채색 비단으로 절을 짓고 명랑 법사와 명승 12명이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쓰니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다. 바람과 파도를 불러온 문두루 주문의 효과에 과장이 있을 수 있으나, 신라는 이를 통해 전란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왕은 뒤이어 같은 곳에 사천왕사를 세웠다. 사천왕이란 수미산 중턱 사방에 머물며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데, 신라에선 호국의 신으로 각광받았다. 사천왕사 창건은 불력을 이용해 민심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지키려 한 문무왕의 승부수였다.

이 절이 다시금 주목받은 것은 일제강점기의 일이다. 낭산 자락에서 다량의 기와 조각과 유려한 문양의 녹유신장상(綠釉神將像) 조각이 발견됨에 따라 그곳은 사천왕사터로 지목됐다. 2006년 이래 진행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발굴 과정에서 문무왕의 호국 염원이 서린 사천왕사가 전모를 드러냈다. 특히 조사단은 녹유신장상이 탑의 기단부 장식품이라는 점과 2개의 거북 모양 비석받침 가운데 하나가 문무왕릉비의 일부임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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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밭을 갈다 발견한 문무왕릉비

역대 왕들의 무덤 앞에 능비를 세우는 경우가 있다. 능비에는 주로 왕의 주요 업적이 새겨진다. 문무왕의 경우 왕릉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능비가 필요 없을 것 같지만 신문왕은 부왕의 능비를 사천왕사에 세웠다. 이 비석은 현재 여러 조각으로 파손된 채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비석은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야 우리 곁에 남을 수 있었다.

1795년 홍양호는 경주에서 한 농부가 밭을 갈다 문무왕릉비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의 탁본을 입수하여 내용을 검토한 다음 기록으로 남겼다. 1817년 김정희는 직접 경주로 가서 사천왕사터 부근 밭둑에 방치된 문무왕릉비를 찾아내 탁본을 뜬 뒤 능비의 작성 시기 등에 대해 연구했다. 그의 조사 이후 능비는 행방이 묘연해졌다. 1961년에 이르러 경주 동부동 민가에서 비석의 아래 조각이 우연히 발견됐고 2009년에는 근처의 다른 민가에서 빨랫돌로 쓰이던 비석 조각을 수도검침원이 우연히 발견했다.

문무왕의 위업이 고스란히 새겨진 능비는 이처럼 숱한 사연을 겪으며 지금까지 전해졌다. 이 능비는 삼국통일 직후 신라의 학문과 서예 수준을 잘 보여주며, 역사책에 기록돼 있지 않은 문무왕의 나이와 화장 과정에 대한 세부 정보가 담겨 있어 신라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자료다.

○ ‘용이 머물던 절’, 감은사

신문왕은 부왕의 은혜에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부왕의 뼛가루를 뿌린 곳 가까이에 절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감은사다. 감은사의 실체는 분명했지만 1950년대까지 그곳에 초가집이 들어차 있어 절의 범위와 가람 배치 등을 제대로 살피기 어려웠다.

1959년 감은사터에 대한 발굴이 시작됐다. 광복 후 처음 실시하는 절터 발굴이었다. 조사원들이 주목한 곳은 금당터였다. 신라 문무왕의 화신인 용이 들어와 머물 수 있도록 금당 섬돌 아래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는 삼국유사의 신이(神異)한 기록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를 진행한 결과 편평한 석재와 돌기둥을 조립해 만든 특이한 시설이 드러났다. 건물 바닥에 공간을 두기 위해 마련한 구조이기에 삼국유사의 기록에 부합하는 것으로 여겼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이 구조물을 방공호로 사용하는 바람에 일부 훼손된 점이 아쉬웠다.

당시 문교부는 그해 말 보존 상태가 나쁜 감은사지 서쪽 석탑에 대한 해체 공사를 시작했다. 탑 부재를 해체하던 중 창건 당시의 사리장엄구를 발견했다. 불법(佛法)의 수호신 사천왕,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 조각과 함께 유려한 문양이 다양하게 표현돼 있었다. 1996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팀이 동쪽 석탑을 해체하던 중 또 하나의 사리장엄구를 발굴했다. 보존 상태가 완벽했고 초정밀 세공술이 구사되어 있었기에 7세기 후반의 신라 공예문화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임을 잘 보여주었다.

젊은 시절 몸소 전장을 누볐고 왕위에 올라서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강역을 지켜낼지 노심초사한 문무왕.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둔 시점까지 백성들의 수고로움을 덜고 나라를 지키려 고민했다. 그에 대한 자료는 상당히 축적되었지만 그와 그의 시대에 대한 연구는 너무나도 적은 편이다. 문무왕을 집중 조명한다면 삼국통일 전후의 역사와 문화가 담긴 거대한 실타래도 차츰 풀릴 것이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불법 수호 사천왕#신라#호국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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