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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어른의 의무, 어른의 품격[이정향의 오후 3시]

이정향 영화감독
입력 2021-02-20 03:00업데이트 2021-02-20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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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그랜 토리노
이정향 영화감독
미국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 외곽에 사는 홀아비 월트는 괴팍한 노인이다. 평생을 포드자동차 공장에서 일했고 그때 구입한 1972년산 그랜 토리노를 애마처럼 아낀다. 그는 버릇없는 요즘 아이들이 못마땅하고, 옆집에 낯선 라오스 사람들이 사는 것도 싫다. 하지만 까칠한 그의 내면엔 수십 년 묵은 죄책감이 있다. 6·25전쟁에 참전했을 때 항복하려는 17세 소년병을 죽인 자신을 혐오하며 살아왔다.

어느 날 그 소년병 또래인 옆집의 타오를 동네 불량배들로부터 구해준 덕에 어쩔 수 없이 라오스 출신 타오의 가족들과 친해진 월트는 아빠 없이 자란 타오에게 집수리하는 법과 남자의 책임감, 예의범절 등을 가르친다. 하지만 불량배들의 보복이 이어지고 급기야는 타오의 누나마저 그들에게 성폭행을 당하자, 복수하려는 타오 대신 지병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월트가 총알받이가 되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다. 월트의 죽음으로 불량배들은 중형을 받고 동네엔 평화가 찾아온다. 월트의 유언장에 따라 타오가 그랜 토리노의 새 주인이 된다.

‘어른 없는 사회’를 쓴 일본 작가 우치다 타츠루는 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사람이 어른이라고 했다. 내가 버린 것도, 내 땅도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한다면 그건 어른이 아니라고.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어른이 귀해졌다. 젊은이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분들이 안 보인다. 친구는 경쟁자니까 그를 돕는 건 바보라고, 정치인이 부정을 저지르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해도 우리 편은 무조건 감싸야 한다고, 남한테 해 끼쳐도 자신에게 득 되는 게 최고라고 가르치는 어른 아닌 어른들이 넘쳐난다. 자식을 부정 입학시킨 부모, 학생들이 나쁜 짓을 해도 꾸짖지 못하는 교사, 학교폭력이 일어나도 은폐하기에 급급한 학교를 보며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자기를 진심으로 위하고 사랑하는 어른이 없다는 걸 아이들은 이미 안다.

청소년들을 훈계하다가 목숨을 잃는 어른들의 뉴스가 심심찮게 들리는 세상이라 어른의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는 이들이 많다. 나 또한 보복이 무서워서 공중도덕을 상실한 아이들을 못 본 척해 왔다. ‘꼰대’ ‘라떼’로 불리며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린 기성세대로서 반성해 본다. 영양가 있는 음식도 맛없으면 안 먹듯이, 좋은 말도 훈계조로 들리면 어깃장을 놓고 싶어진다. 잔소리하는 부모가 싫어서 불량 친구와 어울리는 아이들의 심정이 되어 보자.

다행히도 나 어릴 땐 좋은 어른들이 많았다. 나의 무례함과 철없음을 꾸짖고 바로잡아 준, 거리에서 식당에서 버스에서 한 번 스치고 말 인연임에도 어른의 품격으로 나를 다듬어 준, 어른의 소임을 다해 주신 그분들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보다 형편없었을 거다.

이정향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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