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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동아플래시100]조선의 천재 파일럿을 짝사랑한 일본의 속내는?

입력 2020-10-31 11:40업데이트 2021-01-22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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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2월 11일

플래시백

1922년 12월 5일 밤 남대문 역 광장은 현해탄을 건너오는 한 조선 청년을 먼발치에서라도 보려는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학생, 직장인, 종교인, 기생들까지 몰려 발 떼기조차 힘들었죠. 그런데 이들 가운데엔 일본 보수단체 국수회 회원 1000여 명도 있었습니다. 이틀 뒤 장곡천정 공회당. 60여 명의 일본인을 포함한 유지 200여 명이 누군가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주인공이 나타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고, 일본계 신문인 조선신문의 아키야마 사장과 경성부윤 요시마쓰는 축사를 통해 그의 성공을 기원했습니다. 9일엔 사이토 조선총독이 관저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기도 했고요.

1922년 12월 고국방문 비행 때의 패기만만한 안창남. 오쿠리 비행학교 교수로, 2등 비행사였던 그는 이듬해 7월 일본 항공국으로부터 1등 비행사 면허를 받았는데 당시 일본에서 1등 비행사 면허증을 보유한 사람은 7명에 불과했다.
이처럼 국적과 계급, 정파를 가리지 않고 대대적 환영을 받은 청년은 바로 21세의 천재 비행가 안창남이었습니다. 휘문고보에 다니던 1917년 미국인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 비행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오쿠리 비행학교에서 비행술을 배워 1921년 3등, 이듬해 2등 비행사 면허를 땁니다. 그때마다 콧대 높은 일본인 경쟁자들을 제치고 1, 2등을 차지해 일약 스타로 떠오르죠.

역사적인 고국방문 비행을 앞두고 정비를 마친 뒤 여의도 격납고에서 대기 중인 안창남의 애기, ‘금강호’. 안창남은 이 영국제 단발 복엽기의 몸체 양쪽에 조선 13도 지도를 그려 남다른 애국심을 보였다.
당시로선 최첨단 기술을 보유한 안창남은 부와 명예가 보장된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조선 형제’, ‘조국’을 잊지 않고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꿈은 조선 청년들에게 비행술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첫걸음으로 고국방문 비행을 추진해 1922년 12월 10일을 디데이로 잡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열광하는 것은 당연한데, 일본은 무슨 까닭이었을까요?

고국방문 비행을 위해 1922년 12월 5일 남대문 역에 도착한 안창남을 환영하는 수많은 군중. 이들이 외친 환호에 대해 당시 동아일보는 ‘남산이 울리는 만세소리’라고 보도했다.
일제의 속셈은 일본 땅에서 비행기술을 배운 안창남을 이용해 자기네의 선진 항공 및 군사기술을 홍보하고 식민통치를 미화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 항공국, 조선총독부, 조선군사령부, 평양항공대 등은 안창남의 고국 비행을 적극 지원했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도 안창남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며 조선인이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죠.

1922년 12월 7일 밤 열린 안창남 환영회에 참석한 유지들. 경성부윤, 조선신문사 사장과 같은 일인들도 축사를 하는 등 안창남은 국적, 종교, 계급을 가리지 않는 환영을 받았다. 원 안은 답사하는 안창남.
하지만 안창남은 당하지 않았습니다. 동아일보에 수기를 보내 ‘이번 비행으로 우리도 하면 된다, 남보다 낫다는 신념을 두텁게…’라고 호소하는가 하면 비행 당일엔 여의도를 날아올라 순종이 칩거하던 창덕궁 상공을 선회하며 예를 표하다 ‘세계에서 가장 앞서 비행기를 발명했던 선조의 피가 혈관에 흐르니 우리도 노력하면…’이라는 요지의 삐라를 뿌리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배신감을 느꼈을 법합니다. 당초 평양, 진남포, 개성, 대구, 부산, 신의주, 만주의 안동현까지 계획했던 고국방문 비행이 경성과 인천에 국한됐고, 그에게 비행기를 마련해주기 위해 모금에 나섰던 ‘고국방문 비행 후원회’가 결실 없이 흐지부지 끝나버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국방문 비행에서 창덕궁 위를 배회하며 순종에 예를 표하는 안창남의 금강호. 일제는 안창남을 첨단 과학기술의 아이콘으로 선전하며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지만 안창남은 전혀 부응하지 않았다.
일본 비행학교 졸업 때부터 안창남을 눈여겨보던 동아일보는 그의 고국방문 비행을 주최합니다. 12월 11일자 3면을 통째로 할애하는 등 보도에 충실하기도 했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역사적인 광경을 직접 볼 수 있도록 당국과 협의해 행사장 교통편을 늘리기도 했습니다. 모두 민족의식과 함께 ‘과학을 통한 신조선의 건설’이라는 희망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국방문 비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 1923년 1등 비행사 면허를 딴 안창남은 그 해 9월 관동대지진 때 아무 이유 없이 학살당하는 조선 동포들을 지켜보면서 누가 조선민중의 적인지 확실히 깨닫고는 ‘항공 독립운동’에 투신합니다. 중국으로 망명해 중국 군벌 밑에서 힘을 기르던 그는 1928년 비밀결사 대한독립공명단 조직을 주도하며 항일투쟁을 본격화했습니다.

중국으로 건너가 산시성 타이위안 비행학교에서 비행사들을 길러내던 안창남(왼쪽). 그는 이즈음 비밀 독립결사인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지만 1930년 비행기 추락으로 29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하고 말았다.
안창남은 1930년 4월 비행연습 도중 추락해 29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했지만, 그의 항공 독립운동 정신은 1920년대 중반부터 그의 뒤를 따라 중국에서 항일 무장투쟁에 뛰어든 후배 조선 비행사들에게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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