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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소설의 맛[내가 만난 名문장]

이승학 섬과 달 출판사 대표
입력 2020-10-19 03:00업데이트 2020-10-1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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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학 섬과 달 출판사 대표
그는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하늘나라는 다 같이 만나는 곳. 생전에 우리가 알던 사람뿐만 아니라 모르던 사람까지.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사람만 그곳에 없다더라,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제임스 설터, ‘올 댓 이즈’ 중

한여름을 소설의 성수기로 보는 게 출판계의 관행이지만 소설을 허구 이상의 것으로 보는 내게 소설이 더욱 애틋해지는 건 지금처럼 계절이 스산할 때다. 마음껏 풀어져도 됐던 한창때를 뒤로하고 춥고 막막한 마음이 들어앉는 시기. 아흔 살에 작고한 미국 작가 제임스 설터의 유작에 나오는 저 문장이 이맘때 위로가 되는 건 지난날 마음껏 풀어지지도 못했고 앞날 막막함이 가시지도 않을 한 인생이 이대로 끝은 아닐 거라는 기대를 줘서다.

‘올 댓 이즈’는 한 남성, 필립 보먼의 일대기다. 편모 가정, 제2차 세계대전, 대학 졸업, 직장 생활, 한 번의 결혼, 한 번의 이혼, 몇 번의 연애, 그중 한 차례는 지독한 배반, 어머니와의 이별, 적당한 성공 뒤 맞는 노년. 이렇다 할 클라이맥스가 없었던 작가 자신의 삶을 닮은 이 소설은 그러나 삶을 어떤 연민도 허세도 없이 스케치하고, 어느덧 다리에서 노인 티가 나는 주인공이 장거리 여행을 맘먹는 것으로 끝난다.

공교롭게도 인생 중반을 넘긴 난 지난해 오랜 피고용자 생활을 끝내고 내 출판사를 차렸다. ‘출판’ 하면 으레 짐작되는 경우의 수를 벗어나지 않는 인생이 전개될 것이다. 모험보단 추억을 아끼게 될 것이다. 세월과 함께 이별도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체념과 불안이 덤벼들수록 난 작가가 노년에 쓴, 믿는 사람에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단 말이 주술처럼 떠오른다. 믿는다는 건 아직 겪지 않았다는 뜻이고, 겪지 않았다는 건 가능성이 남았다는 뜻이다. 이 가능성으로 다른 삶을 기대하고 지금을 견디는 일, 역시 소설은 스산할 때 맛이 깊다.

이승학 섬과 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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