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조심했어야 하지 않나” 편견에 두번 우는 임신중절여성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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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기피 증세 호소하기도
낙태죄 폐지 놓고 논란 커지자 “나도 낙태” 경험 공유하며 응원

“낙태까지 했다는 건 ‘닳고 닳았다’는 뜻 아닌가요.”

대학생 정모 씨(24)는 최근 한 온라인 게시글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2018년 첫 남자친구와 사귀다가 불가피하게 임신중절수술을 한 경험이 있다. 피임을 철저히 했는데도 벌어진 사고였다. 수술 뒤 그는 사회생활이 힘들었다. 모두가 자신을 ‘생각 없이 관계 맺는 여성’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얼마 뒤 듣던 수업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 찬반 토론’은 더 괴로웠다. 한 남학생이 “솔직히 그런 수술까지 치러본 여성들은 경험이 적지 않을 텐데, 스스로 조심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당시 정 씨는 혹시라도 속내를 들킬까 봐 괜히 더 낙태죄 폐지에 열을 올려 반대했다고 한다. “그런 나 자신이 부끄러워 상처는 더 커져 갔어요.”

정부가 임신 초기인 14주까지 낙태를 전면 허용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7일 입법 예고한 뒤 최근 소셜미디어에서는 ‘#나는 낙태했다’ 해시태그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 임신중절수술을 경험했던 여성들이 자신이 겪었던 사회적 편견과 심리적 고통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당당히 맞서 싸우고 있다.

이들 가운데 동아일보가 만난 여성 5명은 길게는 10년이 지나도 몸과 마음의 상처가 지워지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수술 당일 경험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낙태 여성을 향한 성희롱과 모욕적인 시선 때문이었다.

몇 년 전 수술했던 김모 씨(28)는 수술 후 겪은 성희롱으로 사람 만나는 걸 꺼렸다. 당시 남자친구의 지인들이 끔찍한 전화를 걸어댔다고 한다. 무작정 걸어놓고 아무 말도 없이 이상한 신음소리만 내다 끊었다. 김 씨는 “내가 더러운 사람이라고 여겨져 이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만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울먹였다.

임신은 남녀 공동 책임인데도 연인관계에서 여성을 죄인 취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박모 씨(37)는 9년 전 수술 당일에 남자친구가 나타나지 않았던 걸 떠올렸다. 이후 집으로 찾아온 그는 “널 걱정하느라 잠을 못 자서 몸이 쑤신다”며 안마를 요구했다고 한다. 박 씨는 “남자친구에게 의지하고 싶어 ‘저 사람도 힘들 거야. 내 부주의지’ 하며 더 헌신적으로 대했다”고 말했다.

낙태는 예상치 못한 후유증도 만들었다. 김모 씨(30)는 2009년 수술 뒤 하복부 통증이 심해졌다고 한다. 담당 의사는 “아무리 검사해도 몸에 이상이 없다. 심리적으로 불안감이 커져 그런 것 같다”고 설명했다.

“사고는 누구나 언제든 겪을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수술한 여성들에게는 ‘불결하다’고 말해요. 이젠 괜찮아졌다고 스스로 말해보지만…. 주위의 시선이 상처를 더 아프게 만듭니다.”(이모 씨·37)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조지윤 인턴기자 성균관대 글로벌경제학과 4학년
#임신중절여성#낙태죄#대인기피#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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