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모도원 도행역시[오늘과 내일/서정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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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 파묘 국가정체성과 직결… 귀신 타령 같은 감성 호소 안 돼

서정보 문화부장
서정보 문화부장
중국 춘추시대 풍운아를 꼽으라면 단연 오자서(伍子胥)를 들 수 있다. 사기(史記)의 사마천은 오자서 열전에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했고, 그의 비극적 운명에 안타까운 심정까지 표현했다. 고난스러웠던 그의 일생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초나라 명문가이자 대신이었던 아버지와 형이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초평왕에게 죽임을 당하자, 오자서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 오나라로 떠난다.

지략과 인내, 용기를 겸비한 그는 오왕 합려의 최측근이 됐고 마침내 손자병법을 지은 손무와 함께 초나라를 침공한다. 오나라 군대는 파죽지세로 초나라 수도까지 점령했다. 당시 오자서의 아버지를 죽인 초평왕은 이미 죽은 지 꽤 지난 상황. 오자서는 기어코 그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채찍으로 300대나 때렸다. 일종의 ‘파묘’를 한 것인데 이를 ‘굴묘편시(掘墓鞭屍)’라고 한다. 이때 사마천은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를 등장시켜 둘 간의 유명한 문답을 소개한다.

신포서는 사람을 보내 “그대의 복수가 이렇게 심하다니 (중략) 그대는 죽은 사람을 욕보이니 이 어찌 하늘의 도를 어기는 극한 행동이 아니리오”라는 말을 전했다. 오자서는 ‘일모도원(日暮途遠) 도행역시(倒行逆施)’라고 답한다. 지금도 많이 회자되는 이 말은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이 멀어 이치에 어긋나지만 일을 거꾸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 오자서도 파묘에 대해 올바른 일은 아니라고 여기면서도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고 인간적 고백을 한 것이다.

굴묘편시와 비슷한 부관참시(剖棺斬屍)는 공식적 형벌은 아니었으나 가장 극악한 형벌로 꼽힌다. 조선시대 연산군은 그의 어머니 윤씨가 참소를 당해 죽임을 당한 것을 알고, 그 일에 연루됐던 대신 중에 이미 죽은 사람들의 묘를 파헤쳐 부관참시했다. 그중에는 김종직 한명회 정여창 남효온 성현 등 저명한 유학자들이 포함돼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복수에 사무쳤던 연산군은 “후세의 사람들로 나라에 불충하면 죽은 후에 베임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파묘’의 끝은 좋지 않았다. 파묘로 초나라의 여론을 잃은 오나라 군대는 진나라의 구원군이 오자 쫓기듯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오자서는 합려가 죽은 뒤 아들 부차를 섬겼으나 참소를 받자 스스로 자결했다. 연산군의 부관참시에 관여했던 간신 임사홍 역시 중종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죽임을 당했고, 20여 일 후 다시 부관참시를 당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때 아닌 ‘파묘’ 논란이 일고 있다. 오자서 연산군 같은 전근대의 파묘와 지금 논란이 되는 파묘를 동일선상에서 놓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국립현충원에서의 파묘, 즉 누구를 빼느냐는 것은 국가 정체성에 관한 문제다. 이 파묘를 주도하는 강창일 전 의원은 파묘와 관련한 국회 공청회의 기조강연을 통해 “한국에는 귀신 신앙이 있다, 옆에서 원수가 귀신이 돼서 논다고 하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당위성을 언급했다. 하지만 국가 정체성의 문제에 적어도 전근대적인 귀신 타령으로 감성에 호소해서는 안 된다. 몇몇 의원들이 법을 만들어 서둘러 처리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논의 과정을 통해 ‘대한민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논의해야 한다. 더구나 ‘민족 반역자’ ‘원수’ 등의 자극적 용어로 단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안 된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에서 볼 때 이 사람이 ‘자격’을 갖추었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오자서는 일모도원해서 도행역시를 한 것이 아니라 도행역시를 해서 일모도원해진 것은 아닐까.

서정보 문화부장 suhchoi@donga.com
#현충원#파묘#국가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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