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에서 희망은 ‘살자, 살아남자’뿐… 다른 꿈은 꿀 수 없었다”

손효주 기자 입력 2020-05-16 03:00수정 2020-05-17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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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70주년] 노병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1>소총수 참전 이근엽 전 연세대 교수
6·25 참전용사 이근엽 전 연세대 교수가 1954년 일등중사(현재의 하사)로 전역할 당시 받은 명예제대증을 들어 보이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8만9600명. 정부에 등록된 6·25전쟁 참전 유공자 중 지난해 12월 현재 살아있는 이들이다. 2010년 12월까지만 해도 생존자 수는 18만6315명이었지만 9년 사이에 10만 명 가까이 줄었다. 6·25 참전 유공자의 평균 연령은 우리 나이로 90세다.

동아일보는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와 공동으로 6·25 참전용사들이 직접 전쟁의 참상과 후대에 남기고 싶은 말을 전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취재진이 만난 참전용사들이 들려준 각자의 전쟁 이야기는 6·25 전쟁사의 숨겨진 퍼즐이었다.

소총수로 참전했던 이근엽 전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90)는 이등중사(현재의 병장) 시절인 1953년 6월 화랑무공훈장이 나왔지만, 이를 모르고 있다가 지난해에야 수훈한 잊혀진 영웅이었다. 이 전 교수와의 인터뷰를 1인칭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몸소 겪은 날것의 전쟁 이야기다. 》


지옥에서 빠져나오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침 공기를 실컷 들이마셨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전쟁 없는 공기’였다. 트럭 한 대가 산 중턱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1952년 늦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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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통에도 봄은 왔다. 중부전선 오성산(강원 김화군·현재 북한) 고지를 벗어나 서울로 가는 길. 트럭 짐칸에 앉아 둘러본 전쟁 한복판의 봄은 허허벌판이었다. 사람들은 종적을 감췄다. 생명력 잃은 들판이 끝없이 이어졌다.

●‘저들은 저렇게 자유로운데…’



입대 1년 반 만의 첫 휴가였다. 그간은 여러 번 휴가를 포기했다. 고향이 함경남도 함흥이어서 휴가를 가봐야 갈 곳도, 만날 이도 없어서였다. 당시 중대장 편부만 대위는 그런 나를 안타까워했다. 그는 “우리 집으로 휴가 가면 되지 않느냐”며 등을 떠밀었다. 편 대위 집이 있는 종로로 가는 내내 이른 뙤약볕을 받고 앉아 산야를 구경했다. 어쩌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를 풍경이었다.

서울에서의 2박 3일 휴가 기간 대부분 잠을 잤다. 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이 계속되면서 대규모 전투는 없었지만,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려는 38선 중심의 고지 쟁탈전은 치열했다. 한밤중 계속되는 진지 이동과 전투에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유엔군이 공습을 실시하는 낮을 피해 야간에 집중 공격했다. 한 밤중 소변을 보러 나간 전우는 머리에 조준사격을 받고 죽었다. 비슷한 일이 비일비재했다. 밤은 공포였다.

먹고 자는 것 외에 휴가 중 한 유일한 일은 종로의 극장에 간 것이었다. 점령과 수복, 재점령과 재수복을 겪은 서울은 폐허를 방불케 했지만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극장을 채우고 있었다.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사람 구경을 했다. 영상이 빛을 터뜨리며 관객석을 밝혔다. 그때마다 웃음기 머금은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어쩌다 사람 죽는 곳, 그것도 한복판에 들어가게 됐나. 저들은 저렇게 자유로운데….’ 내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군복을 입고 M1 소총을 세워놓은 채 앉아있던 나는 총구를 이마에 갖다 댔다. ‘여기서 죽을까. 지금 죽지 않으면 다시 지옥에 가야 하는데…. 여기서 죽으나 거기서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다. 방아쇠를 당기자.’ 하지만 끝내 방아쇠를 당기진 못했다.

전장에서 머리가 터지고 팔다리가 잘린 채 죽은 전우를 볼 때면 그 모습이 내 모습처럼 보였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의연하게 죽는 이는 없었다. 현실의 죽음은 비장하지 못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 아이처럼 “엄마” 하고 중얼거리며 죽는 이들을 나는 여러 번 봤다.

광복 이후 내겐 남쪽의 대학에 다니고 영어 공부를 해보자는 구체적인 꿈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내 꿈은 “살자, 살자”뿐이었다. 다른 꿈을 꿀 수도, 계획을 세울 수도 없었다.

● 전쟁은 낭만이 아닌 죽는 일



1950년 전쟁이 발발할 때만 해도 전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북한 체제와 소련을 혐오하고 남한과 미국을 동경하던 스무 살 청년이었다. 미군 전투기가 지나갈 때는 산꼭대기에 올라 러닝셔츠를 벗어 흔들며 반겼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해 오기만을 고대했다. 1950년 10월 수도사단이 함흥에 왔다. 나를 포함한 함흥남부교회 청년들은 그해 12월 국군에 자진 입대했다. 군대에 안 가려고 나이를 열 살씩 올리는 식으로 호적을 바꾸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그건 사나이로서 치사해보였다.

12월 14일부터 흥남 철수작전이 시작됐다. 그즈음 어느 저녁, 나는 미군 수송선(LST)에 올랐다. 나와 다른 훈련병들은 함정 아래 선창(船倉)에 몸을 실었다. 밤새 파도 소리가 새어 들었다.

동이 트고 배에서 내려보니 묵호항(강원 동해시)이었다. 기상나팔이 울리면 새벽 5시부터 밤까지 훈련을 했다. 소총을 쏘고 얼어붙은 논밭 위로 포복했다. 훈련병들은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전방에 보내 달라. 싸우고 이겨서 고향에 가겠다.” 저마다 아우성이었다. 나는 전쟁을 낭만적인 무언가로 생각했다.

전방에 투입된 건 1951년 5월(중공군 제6차 공세)이었다. 수도사단 1연대 1대대 2중대 소총수로 첫 전투에 나섰다. 강원 양양군 오색리 350m 고지 전투였다.

그날 ‘전쟁의 낭만’은 끝났다. 첫날 투입된 1중대 병력 대부분이 전사했다. 뒤이어 2중대가 진격하는데 기관총탄이 날아들었다. 북한군 수류탄이 바위에 부딪힌 뒤 제멋대로 튀며 폭발했다. 전술도 작전도 무의미했다. 죽고 사는 건 그저 운이었다. 9분 능선부터 일제히 돌격해 올라가보니 머리가 깨진 북한군 시체가 가득했다. 우리 중대도 16명이 전사했다. 밤새 시체를 옮겼다.

그제야 알았다. 사람 죽는 곳에 왔구나. 순간 철이 들었다. 그때부터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전방엔 영웅도 낭만도 없었다. 전방은 죽는 곳이었다.

수도사단은 이후 중공군 주도의 공세가 이어진 가리봉, 향로봉 등으로 진지를 이동하며 전투를 치렀다. 전투 현장에서 나는 미군 병사가 건네준 노래책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 총탄에 죽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해 10월 공비 토벌 임무를 맡아 후방에 가기까지 매일 “살자, 살자” 되뇌었다.

● 전장 최고의 행운은 부상

훈장받는 참전용사 이근엽

후방 생활은 길지 않았다. 1952년 봄 김화로 투입됐다. 트럭에 실려 다시 최전방으로 향하는 길. 나는 무덤으로 가는 기분이었다.

최전방은 쉴 틈이 없었다. 내 꿈은 그즈음 바뀌었다. 부상당하는 것이었다. 부상당하면 후방에 갈 수 있었다. 병사들은 “살아있으면 고생이요, 죽으면 행복이요, 부상당하면 100만 달러”라고 말하곤 했다. 부상은 병사에게 전장 최고의 행운이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지(死地)에도 희망을 가진 이는 있었다. 1952년 가을 윤필효 중위가 중대장으로 부임해 왔다. 그는 나를 불러 “곧 휴전이 될 거 같다”고 했다. 북한에서의 생활은 어땠는지도 종종 물었다. 1953년 1월 초엔 고향인 경남 함안으로 휴가를 가 여교사와 약혼하고 왔다고 했다. “휴전이 되면 결혼식을 올릴 것이다. 너는 고향에 갈 수 없으니 함안에서 나와 같이 살자”고도 했다. 그는 내게 남쪽 고향을 만들어주고 싶어 했다.

일주일 후 윤 중위는 전사했다. 1월 15일 북한군과 중공군은 김화군 원남면에 구축한 우리 진지를 공격했다. 전우들이 눈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중대장 벙커엔 윤 중위가 쓰러져 있었다. 오른손에 대검을 쥔 채였다. 머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해 7월 중공군은 휴전 직전 최후의 공세에 돌입했다. 7월 13일 밤 소대장은 “우측 5사단이 무너졌다. 우리가 포위되고 있다. 제2방어선으로 이동하라”고 소리쳤다. 금성전투의 서막이었다. 나는 죽자 사자 뛰었다. 1연대가 2500명쯤이었는데 제2방어선에 모인 병력은 600명이 안돼 보였다.

14일 밤엔 부슬비가 내렸다. 중공군의 총공격이 이어졌고, 그날 백암산(강원 화천)에 있던 나는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 파편을 맞았다. 다리와 머리에 파편이 박혔다. 적정(敵情)을 살피려는 섬광탄이 연이어 터졌다. 나는 혼자였다.

소총을 지팡이 삼아 짚고 고지로 올라갔다. 배가 고팠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건빵은 비에 젖어 밀가루 반죽이 돼 있었다. 이를 입으로 욱여넣었다. 섬광탄이 또 터졌다. 산 아래를 보니 국군 차량 수십 대가 후퇴하고 있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더군다나 휴전이 코앞이었다.

대검으로 칡넝쿨을 끊어내며 아래로 향했다. 새벽 4시쯤 되자 큰길이 나왔다. 어쩐 일인지 국군 앰뷸런스가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속으로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외쳤다. 나의 전쟁은 그렇게 끝났다.

부산 제5육군병원에 도착했다. 미군이 구호품으로 준 분유를 따뜻한 물에 타 단숨에 들이켰다. 처음 먹어보는 우유의 온기가 몸 곳곳에 퍼졌다. 이제는 살았다 싶었다. 나는 인간 세상에 돌아와 있었다. 8개월간 병원 생활을 했다. 그사이 휴전(1953년 7월 27일)이 됐다고 했다. 휴전은 내게 그리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살았으면 그걸로 된 것이었다.

● “기억은 힘이 없다”

이 전 교수가 지난해 9월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을 방문해 66년 만에 화랑무공훈장을 받으며 당시 사단장이던 유기종 소장과 기념 촬영한 모습.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공

지난해 뒤늦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953년 훈장이 나왔다는데 전쟁통이라 까맣게 몰랐다. 지난해 9월 수도기계화보병사단(전쟁 당시 수도사단)에 가 훈장을 받았다. 사단에선 장갑차를 내보내 나를 연병장 사열대까지 태워갔다. 사단장과 장병들이 나와 예우를 다했다. 하사(당시 일등중사)로 전역한 나는 맥아더 장군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날 후배 장병들에게 말했다.


“다시는 전쟁이 나면 안 됩니다. 전쟁이 나면 다 죽습니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대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라고 하는데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고,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통일을 해야 합니다.”


여생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나지 않도록 각성시키는 글을 쓰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떤 방법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기억은 아무런 힘이 없다. 시신을 후송할 겨를조차 없어 산 아래 아무렇게나 묻어둔 내 전우들을 누가 기억해 줄까. 죽기 전에 잠든 전우들이 있는 백암산에 가보려 한다. 초목 무성해진 그곳에서 그들은 편히 쉬고 있을까.

**이제는 다 잊고 고이 쉬게나. 종달새 울음소리가 나거든 이따금 잠에서 깨어나 주시게. 나는 젊은 당신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오.**



▼ ‘철의 삼각지대’서 전투 치러…금성전투서 중공군에 부상 ▼



이근엽 전 교수가 6·25전쟁 당시 주로 전투를 치른 북한의 강원 김화군은 철원군, 평강군과 함께 중부전선 최대 격전지인 ‘철의 삼각지대’다. 철의 삼각지대는 38선 일대 전략적 요충지이자 동서로 연결되는 주요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 요지여서 아군과 중공군, 인민군 간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던 곳이다. 백마고지 전투(1952년 10월 6~15일), 저격능선 전투(1952년 10월 14일~11월 24일) 등 유명한 고지 쟁탈전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철의 삼각지대에서의 아군 사상자만 2만4000여 명에 이른다. 전쟁 기간 가장 많은 전사자가 발생한 지역 중 한 곳이다.

그가 부상당한 금성전투는 1953년 7월 13~19일 김화군 금성면, 원남면 등에서 벌어진 6·25전쟁 마지막 대규모 전투다. 당시 중공군은 7월 13일 15개 사단 병력을 동원해 유엔군이 1951년 10월부터 확보한 금성돌출부(전선이 헬멧처럼 북쪽으로 돌출된 지역)를 차지하기 위한 공세를 감행했다. 금성돌출부를 방어하던 수도사단, 5사단 등 국군 6개 사단은 금성천 남쪽으로 후퇴한 뒤 반격해 ‘아이슬란드선’(간진현~금성천~462고지)까지 회복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6·25 70주년#이근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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