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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러시아에선 사람들이 사슴을 타고 다닌다고요?

입력 2018-12-01 03:00업데이트 2018-12-0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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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다문화 학생 폭력 희생 계기로 본 한국 속의 ‘러시아 이웃’
지난달 25일 서울 용산구 청파로의 한 러시아 어학원에 국내 거주 러시아인 단체 관계자 등이 모여 한국 사회에서 러시아인들에 대한 인식을 높일 방안 등을 논의하고 있다.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인천의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는 아이가 ‘러시아는 추워서 자동차가 다니지 못할 때는 사람들이 사슴을 타고 다닌다’고 학교에서 배웠다고 한다.”

“중학생들이 레닌이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러시아 역사에 대한 내용이 거의 없다.”

지난달 25일 서울 용산구 청파로의 ‘러시아 아카데미 뉴웨이 어학원’. 전날 발생한 KT 아현지사 통신구 화재로 휴대전화 인터넷과 전화가 안돼 문자로 받아 놓은 길이름 주소를 보고 찾아간 이곳에서는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등 러시아어권 각계 인사 10여 명이 모여 열띤 논의를 진행 중이었다. 프리마코바 타티야나 러시아 커뮤니티협회 회장은 “인천에서 친구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한 뒤 15층 아파트에서 떨어져 숨진 A 군 사건을 보고 러시아어권 커뮤니티 사람들의 불안감이 높아져 모이게 됐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10월 20일 경남 김해에선 5층짜리 원룸에서 난 화재로 우즈베키스탄 국적의 고려인 4세 아이와 그의 누나(14)가 숨졌다. 이들은 화재 당시 2층에 있었고 불은 20여 분만에 진화됐다. 하지만 부모가 일하러 나간 사이 집에 있던 남매가 ‘불이야’라는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해 제대로 대피하지 못하면서 참사가 발생했다.

국내 거주 러시아어권 외국인(고려인 동포 포함)이 최근 수년 사이 급증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사회적 이해와 인식, 관심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두 사건은 웅변처럼 보여주고 있다.

○ 러시아에 대한 편견과 무지가 불러온 죽음

뉴웨이 어학원 모임은 국내 러시아어권 거주민(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모임 중 하나인 ‘러시아 단체 조정협의회’의 주최로 열렸다. 서울과 수도권 지역에서 온 참석자들은 A 군이 ‘러시아 아이’라며 조롱당하다 목숨까지 잃게 된 일에 안타까운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A 군은 한국인 아버지와 러시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외모가 조금 달랐다. 이런 이유로 초등학생 때부터 ‘러시아 엄마랑 사는 외국인’이라는 놀림을 받으며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모임 참석자들은 학교에서 러시아어권 아이들이 학생은 물론 교사나 학교로부터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는 일이 적잖다며 앞다퉈 사례들을 쏟아냈다.

“아이가 알레르기로 얼굴이 검붉게 변했는데 ‘외국인이라 그렇게 더럽게 하고 다니냐’는 핀잔을 받았다.” “대전의 어느 학교에서는 부모가 학교에 불만을 제기한 뒤 불이익을 받았다고 한다.” “인천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러시아 학생이 3분의 1 이상으로 늘어나자 한국 학부모들이 항의하고, 심지어 이사를 가는 일도 있었다.” “학교에서 아이가 폭행이나 괴롭힘을 당해도 학교의 누구와 상의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한 참석자는 기자에게 “한국 중학교의 청소년 폭력이 심각한 수준은 아닌 것으로 아는데 A 군이 러시아 사람이어서 이런 일을 당한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러시아인들이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씩 의견을 교환하는 페이스북이나 단체 카톡방, ‘러시아 단체 조정협의회’ 홈페이지 등에서도 A 군 사건을 두고 다양한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글의 대부분은 안타까움과 우려를 토로하는 내용들이다. 예카테리나 포포바 성균관대 러시아어문학과 교수는 “페이스북 등에는 A 군 사건으로 쇼크를 받았다. 어찌 이럴 수 있나. 한국 학교 보내기가 겁난다는 등의 글이 올라왔다”고 전했다.

이들은 러시아에 대한 낮은 이해도가 인천 A 군 사건의 배경에 깔려 있다는 분석도 내놨다. 뉴웨이 어학원 모임의 한 참석자는 “중학교에서 배우는 내용 중 러시아에 관한 것은 너무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며 “대학생들도 러시아 문학가로 톨스토이(1828∼1910)나 도스토옙스키(1821∼1881) 이후로는 모른다. 가장 많이 알려진 푸시킨(1799∼1837)은 국민 문학인이긴 하지만 한 세기 훨씬 전 인물”이라고 말했다. 포포바 교수는 “러시아가 추운 나라지만 사계절도 있고, 제주도만큼 따뜻한 남쪽 지방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들도 있다”고 소개했다.

전문가들은 한국 거주 러시아인들의 서툰 한국어 능력도 사태를 부추겼다고 지적했다. 잔나 발로드 서경대 국제비즈니스 어학부 교수는 “한국인과 결혼한 러시아인 엄마들은 한국어가 서툴러 학교에서 아이들 문제로 제대로 상담조차 못한다”며 “스스로 노력해야 할 부분도 있다”고 강조했다.

뉴웨이 어학원 모임에선 옐레나 카시보마 러시아 단체 조정협의회장이 마련한 A4 용지 2장 분량의 건의문 초안을 놓고 진지한 토론이 이어졌다.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확정하게 될 건의문은 러시아 학생 등 외국인에 대한 편견을 줄이고 교내 폭력 방지를 위해 노력해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 피사레바 라리사 중앙대 러시아어문학부 교수는 “건의문이 확정되면 언론에도 알리고 다문화 가정 주무부서인 여성가족부 등 관련 부처에도 제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한국어 서툴지만 고려인은 우리 동포

러시아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 온 고려인들도 마찬가지 고통을 겪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말을 몰라 언어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일이 많다. 그 결과 동포라기보다는 ‘외국인’이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다.

이에 대해 고려인 4세인 김 알렉산더 러시아아카데미 안산어학원 원장은 동아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한국에 오는 중국 조선족 동포들은 대부분 한국말을 잘하는데 고려인은 잘못하는 사람이 많다”며 “여기에는 역사적인 아픔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1937년 스탈린 체제에서 고려인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뒤 △다른 지역 이주 금지 △현지인과 교류 금지 △조선어 사용 금지 등과 같은 조치가 취해졌다. 김 원장은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려인이 한국말도 못해’라고 일방적인 편견을 가지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한국에서 12년째 살고 있는 김 원장은 “고려인을 과거에 고착된 이미지로만 보려는 인식도 문제”라고 덧붙였다. 한국인 상당수가 고려인을 만나면 ‘강제로 이주당해서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살고 있나’라는 식으로만 본다는 것이다.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각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아온 사람들을 고려인 전체로 여기는 것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오해라고 김 원장은 지적했다. 이는 한국과 중국 수교 초기 식당 종업원이나 공장 근로자로 한국을 방문하는 조선족 동포들을 보고 전체 조선족의 모습으로 받아들였던 상황과 마찬가지다. 김 원장은 “조선족 동포에 대한 인식은 이후 많이 바뀌었지만 고려인 동포는 여전히 ‘가난한 동포’라는 이미지로만 보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고려인은 이미 3, 4세로 넘어가면서 ‘강제 이주’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고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지역 국가들에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많이 높아진 상태. 김 원장은 “정부의 재외동포 정책에는 크게 개선해야 할 점은 없다”면서도 “고려인 동포나 학생 초청 행사가 사할린에만 편중돼 중앙아시아 지역이 상대적으로 소외된 점은 아쉽다”고 말했다.

○ 가까워진 이웃에 대한 부족한 이해

서울 중구 광희동 지하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8번 출구 주변의 상가에는 러시아 간판이 다수 눈에 띈다. 여행사와 환전소, 휴대전화 대리점 등의 간판과 안내판에 러시아어가 가득 적혀 있다. 1990년 소련과 수교한 이후 ‘서울 속의 작은 러시아’라고 불리는 곳 중 하나다. 광희동의 우즈베키스탄 요리 전문점인 ‘사마리칸트’의 종업원은 “2014년 문을 연 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인 손님이 대부분이었으나 최근에는 한국인 이용객도 늘고 있다”고 귀띔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국내에 거주하는 러시아인(고려인 포함)은 2013년 1만2800여 명에서 올해 10월 말 기준 5만7300여 명으로 5년 새 4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러시아어권 중 가장 많은 우즈베키스탄 국적의 국내 거주자는 같은 기간 3만8500여 명에서 6만9600여 명으로 80%가 늘었다. 국내 거주 러시아어권 주민이 늘어난 것은 2014년부터 시행된 한국과 러시아 간 무비자 정책, 러시아 유학생들의 한국행 증가, 고려인 동포들의 입국 및 정착 증가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국내 거주 러시아 국적 고려인은 2013년 5051명에서 지난해 2만1264명으로 4배가량 늘었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등에는 30만 명가량의 고려인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지난해 말 국내에 거주하는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4개국 출신 고려인은 모두 6만3900여 명. 조선족(70만2900여 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외국인 거주자다.

러시아어권 국가 거주자들이 이처럼 ‘가까워진 이웃’이 됐지만 서로에 대한 인식과 이해 수준은 여전히 낮은 것으로 평가됐다.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는 2017년에 한국과 러시아에서 각각 1000명과 1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 ‘양국 국민상호인식 조사’에서 “상대국 국가에 대한 정보는 주로 국가 개황이나 지리적 요소와 같은 일반적인 정보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민감한 현안에 대한 인식 차도 컸다. ‘남북한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러시아가 북한을 지원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한국인은 50%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러시아인 응답자의 59%는 “중재자로 남을 것”, 26%는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국인들에게는 러시아가 여전히 ‘6·25전쟁을 지원한 소련’이라는 이미지로만 남아 있다는 뜻이다.



○ 국내 거주 러시아·고려인, 신북방 정책의 큰 자산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9월 러시아와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9개 다리(나인 브리지)’를 제시했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신북방 정책에서 러시아가 핵심 대상국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지난달에는 ‘한-러 지방 정부 포럼’도 발족됐다. 전문가들은 이런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신북방 정책은 국내 거주 러시아어권 거주자들과의 원만한 소통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고려인들은 과거 중국 대륙에 진출할 때 조선족 동포들과 유사하게 큰 자산이 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서울시는 2016년부터 외국인주민대표자회의를 운영 중이고, 러시아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8년째 러시아 거주민 단체와 함께 ‘백만송이 장미’ 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외국인주민대표자회의에는 23개 나라 38명의 대표가 참가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 출신으로 대표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는 투라예바 우르피야나 씨는 “러시아어권에서 5명이 대표로 참가해 제안한 내용들이 채택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한-러 양국 국민 상호인식 조사를 진행한 한국외국어대 김현택 교수는 지난달 한-러대화(KRD)와 외교부 한양대 공동 주최로 열린 ‘한-러대화 공공외교 세미나’에서 “상호 문화교류의 해로 지정한 2020년을 러시아 문화외교를 고도화하는 등 양국 이해를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2020년은 한-러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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