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근로시간 단축, 숨은 폭탄은 퇴직금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28일 03시 00분


“근로시간이 줄면 임금도 줄 텐데 퇴직금을 미리 정산해 받을 수 없나요?”

노무사 A 씨는 최근 노조로부터 이런 문의를 많이 받는다. 문재인 정부가 근로시간 단축(주당 최대 근로시간 68시간→52시간)을 추진하면서 근로자들은 ‘인생 2막’의 종잣돈인 퇴직금이 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특히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여야 간사가 근로기준법 개정의 최대 쟁점 중 하나인 휴일근로수당을 ‘1.5배’만 주기로 잠정 합의하면서 퇴직금 문제가 ‘폭탄’으로 떠오르고 있다.

퇴직금은 월 통상임금이 아닌 월평균 임금에 근속연수를 곱해 산정한다. 퇴직 직전 월평균 임금이 500만 원인 근로자가 20년간 일했다면 퇴직금으로 1억 원(세전)을 받게 된다. 문제는 근로시간이 줄면 초과근로가 주 12시간으로 제한돼 수당도 함께 감소한다는 점이다. 수당이 줄면 당연히 평균 임금이 감소하고, 퇴직금도 줄 수밖에 없다. 근로시간 단축→수당 감소→평균 임금 감소→퇴직금 감소로 이어지는 셈.


이 때문에 근로시간 단축 전에 퇴직금 중간정산을 요구하는 근로자가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에선 △주택 구입 또는 임차보증금 △질병이나 부상 치료비 △파산 또는 개인회생 △임금피크제 등으로 중간정산 사유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퇴직금은 근로자의 노후 대비가 목적인 만큼 무분별한 중간정산을 막겠다는 취지다. 현재 국회가 논의 중인 근로시간 단축도 중간정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동계가 적극 문제 제기를 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임금피크제는 원래 퇴직금 중간정산 사유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지난해 정년연장법(60세)이 시행되면서 추가됐다. 노동계 요구를 정부와 국회가 수용하면서다. 노동계는 근로시간 단축이 퇴직금 축소로 이어지지 않도록 휴일수당을 현행 1.5배에서 2배로 늘리는 것과 근로시간 감소분에 대한 임금 보전을 요구하고 있다. 경영계는 “근로자가 임금 감소를 감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근로자의 노후 보장을 강화하고 기업 부담을 줄이기 위해 금융회사에 퇴직금을 맡겨 운용하는 퇴직연금제도를 2005년부터 도입했다. 퇴직연금은 퇴직금보다 중간정산이 더 까다롭다.

다만 국내 근로자의 퇴직연금 가입률은 54.4%(올해 6월 기준)밖에 되지 않는다. 여전히 절반에 가까운 근로자가 기업이 직접 운영하는 퇴직금을 받는다. 퇴직연금으로 전환했더라도 근로자 과반수가 동의하면 기업이 직접 운영하는 퇴직금 제도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힘센 노조가 있는 사업장이면 퇴직금 전환을 통해 얼마든지 중간정산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근로자 다수가 퇴직금 중간정산을 요구하면 기업은 엄청난 ‘폭탄’을 떠안게 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추가 고용 부담에 퇴직금 중간정산 폭탄까지 이중고(二重苦)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노무업계의 한 관계자는 “법에 처벌 조항이 없기 때문에 노사 합의로 중간정산을 한다면 정부도 막을 근거가 마땅치 않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계는 여야의 근로시간 단축 잠정 합의안을 저지하기 위한 실력 행사에 나섰다. 양대 노총은 28일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잠정 합의안을 ‘문재인 정부 공약 파기’로 규정하며 집중투쟁 방침을 밝힐 예정이다. 일부 야당 의원들도 노동계에 적극 동조하고 있어 이날 예정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근로기준법 개정안 처리를 두고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근로시간#단축#퇴직금#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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