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중순 강추위가 몰려왔다. 모진 바람이 체감기온을 더 떨어뜨렸다. 도시에 살면서 좀체 겪어보지 못한 한파였다. 아직 몸이 겨울에 채 적응하지 못해 더 추웠던 듯했다. 군에 다녀온 이후로 발이 시리다는 느낌이 처음으로 들었다. 국민학생(그땐 초등학생이 아니었다) 시절 양말 두세 켤레를 겹쳐 신고 학교에 갔던 기억도 설핏 떠올랐다.
양말은 1920년대에야 국내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 전까지 형편이 넉넉한 이들은 버선을 신었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천으로 발을 둘둘 감쌌다. ‘발감개’ 또는 ‘발싸개’라고 했다. 거기에 짚신을 신었다. 작가 김성동은 ‘신발’이 ‘신’과 ‘발’을 합한 표현이라고 말한다. 신은 짚신이고 발은 발에 감던 감발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짚신감발이 줄어 신발이 됐다. 짚신감발 차림으로 겨울을 나기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눈길이라도 걸을라치면 눈 녹은 물이 얼어붙어 발 자체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으리라.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894년에 우리 농민은 집단적으로 이 아픔을 겪었다. 일본군이 조선 왕궁인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자 이해 9월 농민이 떨쳐 일어났다. 바로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다. 일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자는 기개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겨울이 다가오면서 짚신 신은 농민군은 가죽장화 갖춰 신은 일본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역사학자 이이화는 이 가죽장화가 조선에서 수입해 간 쇠가죽으로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일본군은 스나이더 소총과 무라타 연발총으로 무장했다. 스나이더 소총은 총알이 회전하며 날아가고 무라타 연발총은 장전 시간이 줄어 모두 엄청난 살상력을 보였다. 농민군은 쏠 때마다 불을 붙여야 하는 화승총이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없어 죽창을 꼬나든 농민군도 허다했다. 박맹수 원광대 교수는 일본군 1명이 농민군을 최대 500명까지 상대할 화력을 지녔다고 평가한다. 요즘 말로 하면 엄청난 비대칭 전력이었던 셈이다.
일본군과 농민군은 상대를 바라보는 생각도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일본군은 농민군의 씨를 말리겠다는 자세로 덤벼들었다. 실제로 ‘동학당을 모조리 섬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일본군이 농민군 7명을 붙잡아 구호에 맞춰 총검으로 찔러 죽이고 이를 마을 주민들이 보도록 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이에 반해 녹두장군 전봉준은 ‘비록 어쩔 수 없이 싸우더라도 결코 목숨을 상하게 하지 않음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결과는 다 아는 대로 농민군의 참패였다. 연구자에 따라 농민군 희생자를 최대 30만 명까지로 본다. 사실상 마지막 전투 장소였던 우금치에서만 수만 명의 농민군이 이내 500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이노우에 가쓰오(井上勝生) 홋카이도대 명예교수는 ‘동학농민전쟁과 일본’에서 이를 일본군 최초의 ‘제노사이드(종족 학살)’라고까지 평한다. 일본군 전사자는 동학농민전쟁을 통틀어 1명뿐이었다.
이 모든 일을 한 세기도 전에 일어난 과거로만 돌릴 수는 없다. 이 일본군 전사자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고 박 교수는 말한다. 야스쿠니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뿐 아니라 이처럼 일본의 아시아 침략 때 죽은 이들도 함께 있다. 일본 보수세력이 야스쿠니에서 ‘국가를 위해 희생한 전몰자들’을 기릴 때 농민군을 학살한 일본군도 추모하는 것이다. 이노우에 명예교수는 동학농민전쟁 때 일본군이 ‘만인의 한’을 남겼다고 했다. 나는 이 한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반일감정의 깊은 뿌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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