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의 도구에서 예술의 본질에 눈 맞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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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권 회고전 ‘나무에 새긴 30년’

김준권 작가가 올해 완성한 채묵 목판화 ‘푸른 소나무’. 새벽 시간 왕릉을 둘러싼 소나무 숲이 상서로운 푸른 기운을 내뿜는 모습을 표현했다. 김 작가는 특정 지역의 풍경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지 않고 이를 보며 떠오른 생각을 함께 담아낸다. 색깔별로 별도의 목판이 필요해 6개 판에 새겨 완성했다. 김준권 작가 제공
김준권 작가가 올해 완성한 채묵 목판화 ‘푸른 소나무’. 새벽 시간 왕릉을 둘러싼 소나무 숲이 상서로운 푸른 기운을 내뿜는 모습을 표현했다. 김 작가는 특정 지역의 풍경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지 않고 이를 보며 떠오른 생각을 함께 담아낸다. 색깔별로 별도의 목판이 필요해 6개 판에 새겨 완성했다. 김준권 작가 제공
소담스레 눈이 쌓인 시골 마을, 서늘한 새벽 공기를 내뿜는 숲 속 정경, 분홍 꽃잎이 흐드러진 봄날의 꽃나무….

김준권 작가(58·사진)의 서정적인 풍경화를 보면 두 번 놀란다. 먹빛이 부드러운 수묵화 같은데 뾰족한 칼로 파낸 판화다. 평화로운 풍경을 그려내는 작가는 청년 시절엔 민족해방(NL) 계열로 정치 투쟁의 선봉에 섰던 투사였다.

1980년대 미술계의 주류였던 민중 화가들은 민주화 이후 각자의 길을 걸었다. 목판화가 오윤(1946∼1986)은 40세에 요절해 전설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으로 논란을 일으킨 홍성담 작가(59)는 여전히 직설적 화법으로 시대와 불화한다. 투쟁의 도구가 아닌 예술의 본질로 돌아가 미학적 고민을 하는 이들도 있다. 김 작가가 그런 경우다.

민중미술가로 활동하던 시절인 1985년 고무판에 유성잉크를 발라 찍어낸 선묘 위주의 ‘태극도’. 김준권 작가 제공
민중미술가로 활동하던 시절인 1985년 고무판에 유성잉크를 발라 찍어낸 선묘 위주의 ‘태극도’. 김준권 작가 제공
10일 서울 종로구 아라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그의 회고전 ‘나무에 새긴 30년’은 미술 운동가에서 서정적 목판화가로 선회한 작가의 예술 여정을 시기별로 보여준다. 홍익대 미대 졸업 후 미술교사에서 해직 교사로, 민족미술협의회의 사무국장과 상임집행위원장으로 바쁘게 활동하며 억센 선묘 위주의 선동적 작품을 선보였던 작가는 민중미술운동이 동력을 잃자 다른 고민을 해야 했다.

“커다란 이념이 아니라 동네 고샅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감동을 표현할 기술이 없더군요.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선에 투입됐던 거예요. 내가 옳다며 떠들던 것들이 실은 무지의 발로가 아닐까 회의했습니다. 다시 공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떠들썩한 세상 한가운데 서 있던 그는 30대 중반이던 1991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산골짜기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자발적인 유배 생활을 시작했다.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에서 전통적인 수묵인화기법을 익히고, 목판화의 선진국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 다색목판화 우키요에와 중국의 수인판화를 배웠다.

한중일 3국의 목판화 문화를 섭렵한 결과물이 채묵 목판화다. 젊은 시절 여느 목판화가들처럼 서양 종이에 유성물감으로 찍어냈던 그는 지금은 한지에 먹을 안료로 쓴다. 유성판화는 누가 찍든 같은 결과물이 나오지만 수묵판화는 먹의 농도, 목판과 한지의 수분 함량에 따라 작품들이 다 다르다. 그만큼 표현 영역이 넓지만 수분 조절이 어려워 정교한 기술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소재도 바뀌었다. 머릿속 이념을 담아내던 작가는 평범한 이들이 발 디디고 사는 이 땅의 질박한 풍경들을 눈으로, 발로 사생하고 작업실에 앉아 되새김질하며 목판에 새겨낸다.

그가 30년간 그리고, 파고, 찍은 작품은 550여 점. 작품마다 5, 6개의 판을 새겼으니 3000개가 넘고, 작품당 20점 미만의 에디션을 찍었으니 6만 장이 넘는 판화를 내놓은 셈이다. 이번 전시에는 연도별로 7, 8점씩 250여 점을 전시한다.

작업실에 ‘한국목판문화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건 작가는 “목판화란 죽은 나무를 살려내는 일”이라며 “내가 살려낸 것이 무엇인지 묻고 또 묻는다”고 했다. 29일까지. 02-733-1981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나무에 새긴 30년#김준권 작가#푸른 소나무#목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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