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줍음, 앳됨, 낯가림’은 흔히 떠올리는 고졸 은행원들의 겉모습이다. 창구에서 만나는 고객들마저 “학생” 하며 부를 때가 많다. 하지만 자부심은 대졸 행원 못지않다. 당장의 실력은 오히려 대졸 행원을 앞선다. 과거 상업고교 출신의 남자 행원들은 정규직으로 입사해 임원까지 올라가 ‘고졸 행원 1.0세대’로 불렸다.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은행권에 진입한 고졸 행원들은 2.0세대로 구분된다. 어떤 요소가 고졸 행원 1.0세대와 2.0세대를 나누었을까? 》
IBK기업은행에 입행한 고졸 출신 행원 20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울 중구 을지로2가 본점에서 만난 이들은 “정규직 행원이라는 확실한 목표가 생겨 자격증 취득과 진학 준비 등을 하며 더욱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IBK기업은행 경기 군포공단 지점에서 창구직원(텔러)로 일하는 김하은 계장은 이달 1일로 은행에 취업한 지 1년이 됐다. 1년 전 김 계장은 특성화고를 다니면서 대학 진학을 준비하다 시험 삼아 기업은행에 원서를 냈다. 생각지도 않게 덜컥 합격하니 뛸 듯이 기뻤다. 공부에 큰 관심이 없던 터에 ‘용 꼬리’보다는 ‘뱀 머리’가 낫다고 생각해 은행원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였다.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은 수련회(MT)니 미팅이니 캠퍼스의 낭만을 이야기했다. 슬럼프가 찾아오면서 지점에서도 자신을 대졸 행원과 똑같이 대하지 않는 느낌이 괜히 들었다. 은행을 그만 다닐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오기가 생겼다. 공부는 나중에 해도 되지만 취업은 지금 아니면 언제 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업무에 집중했다. 연수 때 했던 롤플레잉(역할) 게임 경험을 십분 활용해 일도 빨리 처리해 나갔다. 그 결과 창구에서 보험이나 펀드상품을 하루에 5, 6개 판매하는 성과를 거뒀다. 팀장이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결국 올해 7월 계약 연장에 성공했다. 그는 “실무 경력을 쌓으면서 나중에 대학에도 진학하고 싶다”며 “학력이 아닌 실력으로 승부해 지점장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달 1일로 기업은행이 고졸 행원을 본격 채용한 지 1년이 지났다. 기업은행을 시작으로 은행권에서 촉발된 고졸 채용 바람은 일반 기업으로도 확산됐다. 고졸 채용이 처음 시작됐을 때만 해도 ‘반짝 채용’에 그칠 것이라는 지적이 많았지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해 고졸 채용의 질을 끌어올렸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대학진학률이 낮았던 1970년대 정규직으로 입행한 행원이 ‘고졸 행원 1.0세대’라면, 최근 비정규직으로 들어와 실무 역량을 쌓아 정규직 전환을 준비하는 이들은 ‘고졸 행원 2.0세대’다. IBK기업은행과 NH농협은행, 산업은행의 고졸 남녀 행원들이 겪은 고졸 행원 2.0세대의 1년을 돌아봤다. ○ 대졸 행원보다 낫다는 자부심
지난해 7월 기업은행에 들어온 고졸 여자 동기 20명은 전원이 업무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매우 그렇다’가 15명(75%), ‘그렇다’가 5명(25%)이었다. 인천 만수동 지점의 전설경 계장은 “은행에 다닌다고 하면 주변의 눈빛이 달라진다”며 “은행원이라는 직업이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 자부심을 줬다”고 말했다.
서울 강동구청역 지점의 이현혜 계장도 “수영과 외국어 공부 등 평소 하고 싶었던 활동을 은행 지원을 받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밝게 웃었다. 또 다른 행원은 기업은행 입행을 ‘내 인생의 로또’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는 “현재 동생 2명이 중1, 고1인데 나마저 대학에 진학했다면 경제적으로 힘들었을 것”이라며 “집도 이사하고 아버지 차도 바꿔드렸다”고 자랑했다.
특히 이들은 대졸 행원보다 더 나은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했다. 기업은행 고졸 행원 20명 중 7명(35%)이 이런 마음을 드러냈다. 인천 석암 지점의 지효영 계장은 “특성화고에서 은행 관련 전문 분야를 배웠기 때문에 상업과 회계 등에서는 대졸자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며 “대졸 동기 ‘언니’들이 나한테 물어볼 때도 많다”고 말했다.
서울 방학동 지점의 박서리 계장은 “어린 나이에 시작하기 때문에 대졸 동기보다 높은 호봉을 받는다”고 고졸의 이점을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어린 나이가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몇몇 고졸 행원은 “어리다고 반말하거나 무시하는 고객도 있다”, “후배 행원이 대졸이라는 이유로 잡일은 거의 내가 한다”와 같은 불평을 털어놓았다. 농고 출신으로 지난해 9월부터 NH농협은행 경남 함양군 지부에서 일하는 양성호 주임은 최근 앞머리를 2 대 8 비율로 가르는 ‘아저씨 스타일’로 바꿨다. 그는 “고객들이 나를 학생으로 보고 돈을 맡기기를 꺼리기도 했다”며 “머리 모양을 바꾸니 고객들의 태도도 달라졌다”고 귀띔했다.
고졸 행원들은 자신과 같은 후배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연봉 및 승진 체계에서 현재 대졸 행원보다 불리해도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의욕이 반영된 것이다. 실제로 기업은행 고졸 행원 20명 중 18명이 이런 자신감을 보였다. 또 12명은 은행장, 1명은 부행장, 7명은 지점장까지 승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의욕을 보였다.
○ 배움으로 꿈을 실현하다
서울 수색 지점에서 일하는 김소영 계장은 “최근 1년간 자신감을 키웠다면 이제는 전문 은행인으로서 지식과 역량을 키우고 싶다”고 했다. 인천 부평 지점의 김은지 계장도 “은행을 대표하는 1등 직원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특히 이들은 대학 대신 은행을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 대신 대부분이 대학 진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행원 생활을 병행하면서 역량을 갖추는 실무 위주의 공부를 하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서울 돈암동 지점의 김소정 계장은 “은행은 나에게 꿈을 심어줬다”고 말했다. 미래가 불확실했던 고교 때는 공부에 관심이 없었지만 이제는 정규직 전환이라는 확실한 단기목표를 갖게 됐다는 것. 그래서 평소 별일이 없으면 독서실을 찾는다. 이런 노력으로 이미 생명보험 및 손해보험 등과 관련된 자격증을 3개나 땄고, 현재는 펀드 관련 자격증을 준비 중이다. 그는 “경제학과 부동산도 공부하고 싶어 올해 대학교 입학도 준비한다”며 “지금은 은행을 다니면서 돈도 벌고 필요한 역량을 쌓은 다음 나중에 대학에 입학해 꿈을 펼치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 강동구청역 지점의 이현혜 계장은 시간 날 때마다 친구들과 게임을 했다. 친구를 고객으로 가정하고 은행 창구에서 고객 응대하는 법을 연습했다. 덕택에 창구에서 자기 차례가 됐는데도 굳이 그의 창구가 빌 때까지 기다렸다가 업무를 맡기는 단골 고객까지 생겼다. 그는 “나와 같은 고졸 행원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선배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고졸 남자 행원들도 미래의 꿈을 키우는 데 열심이다. 덕수고 졸업 뒤 지난해 10월 산업은행에 들어와 서울 강남 지점에 근무하는 유재용 씨는 야간대학의 글로벌경영학과를 다닌다. 그는 “상고생 절반이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회계와 경영을 먼저 배운 유능한 상고 출신이 일선에서 일하면서 주경야독을 하면 충분히 경쟁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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