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백만기의 컨버세이션] 셔츠에 와인을 쏟으면? ‘바닥에 던져라’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9월 20일 11시 23분


코멘트

●일상에서 써먹는 크리에이티브 기술 ②축지법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 표지.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 표지.
필자는 와인을 좋아한다. 아기타다시의 베스트셀러 만화 '신의 물방울'엔 좋은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와인이라는 음료수는 좀 더 불완전하며 그렇기 때문에 결점을 보충하고도 남을 매력으로 넘치고 있었다."

이 문장을 메모하면서 필자는 불현듯 와인처럼 불완전함을 보충하고도 남을 매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와인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얼마 전 친구들과 와인을 먹던 중 아끼던 화이트 셔츠에 와인을 흘리게 된 일 때문이다.

"이거 어떻게 하면 잘 지워지지?" 친구들이 하나둘씩 방법들을 제시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식초로 문지르면 되."

"요즘 미리 바르는 세제 같은 거 있잖아 그걸 써."

한 녀석은 바로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더니 제법 그럴싸한 방법을 찾아냈다.

"1차적으로 중성세제와 물만으로 세탁하고 남은 얼룩은 식초나 오투액션 스프레이, 크린에버 와인킬러 등의 액체형 산소계 표백계를 뿌리고 10분 후 중성제제를 푼 따뜻한 물에 담가 빼면 된대"

그 때 한 친구가 우리를 향해 '썩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바닥에 던져 놔."

우린 일제히 그 친구에게 엄지를 내밀며 "You win!"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정리하면, 옷에 얼룩이 묻었을 때 가장 간단한 해결방법은 "바닥에 던져두라"는 것. 왜? 아내가 알아서 세탁할 거니까.

요즘 아내들이 들으면 기가 막혀할 소리임에 분명하지만 남편들이 세상에서 가장 선호할만한 방법임에 틀림없다.

▶광고에서 정말 필요한 것이 '왕도'

영어에서 지름길을 '로얄 로드(royal road)' 즉 '왕도'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왕이 가는 길이니 쉽고 빨리 갈 수 밖에. 그 친구도 이 왕의 태도로 왕의 해결법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전문용어로 축지법이라 말하고 싶다. 축지법이 무엇인가. 물리적인 공간을 가로질러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이다.

위의 예처럼 "옷에 얼룩이 묻으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라고 질문했을 때 "바닥에 던져놓는다"는 예상외의, 하지만 기가 막히는 쉬운 답변 같은 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발상의 축지법이다.

더 쉬운 예로 얼음이 녹으면 뭐가 되나요? 라고 물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이 된다고 하지만 축지법 좀 써본 이는 "봄이 와요"라고 대답한다.

광고를 기획할 때도 '발상의 축지법'은 필요하다.

파리바게뜨의 광고 PT를 맡은 적이 있었는데 제빵업계에서는 일년 중 가장 큰 이벤트인 크리스마스에 즈음한 케익 매출 증대를 위한 광고였다.

그때 나왔던 키워드가 "크리스마스는 아빠가 만듭니다"였다.

고개가 갸우뚱해지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시는 날이다. 그러나 사실은 어떤가. 크리스마스이브에 케익과 선물을 가져다주는 이는 아빠다. 이건 아빠도 알고 엄마도 알고 심지어 아이들도 이미 다 알고 있다.

결국 크리스마스 날 지갑을 여는 타깃인 아빠들에게 '산타할아버지가 되어주세요'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며 동시에 크리스마스는 산타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빠가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기분 좋은 명분까지 주는 것이다.

크리스마스하면 산타할아버지, 산타하면 선물, 선물하면 케익, 케익하면 아빠. 이렇게 둘러가는 것을 '크리스마스=아빠'로 바로 이어준 발상의 축지법이다.

'내츄럴치클'이라는 껌 브랜드 광고에서도 축지법을 찾을 수 있다.

이 껌이 소비자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다른 껌들은 초산비닐수지라는 합성성분의 껌베이스로 만드는데 반해 내츄럴치클은 자연성분인 천연치클로 만든 껌베이스를 쓴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내용을 15초 광고에서 알리기도 힘들 뿐 아니라 다른 껌들이 사용하는 초산비닐수지라는 성분도 식약청에서 인정받은 것이라 광고 심의를 생각하면 절대 부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고민 끝에 필자는 복잡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쉽게 가는 그러면서도 누구나 15초안에 공감할 수 있는 발상의 축지법을 썼다.

'발상의 축지법'을 활용한 '내추럴치클' 껌 CF 중 한 장면.
'발상의 축지법'을 활용한 '내추럴치클' 껌 CF 중 한 장면.

내츄럴치클은 초산비닐수지 대신 천연치클 성분을 썼으니까 왠지 몸에도 좋을 것 같고 그래서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오히려 자신과 친한 사람 즉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나눌 껌이라면 다른 껌보다는 이 껌을 줄 것이다라는 생각의 흐름에서 중간의 모든 정보들을 가로 질러 이렇게 표현했다.

한명의 여자 메인모델과 엄마뻘로 보이는 두명의 여자가 카메라를 보며 껌을 씹고 있다. 젊은 여자의 독백이 들린다.

A는 내게 내츄럴치클껌을 주고 B는 내게 초산비닐수지껌을 줬어요.

누가 진짜 우리 엄마일까요? (답은 당연히 A)

여자 메인모델이 거울을 보고 있고 양쪽에 두 명의 남자가 껌을 씹고 있다. 여자의 독백이 흐른다

A는 내게 내츄럴치클껌을 주고 B는 내게 초산비닐수지껌을 줬죠.

난 누구와 키스했을까요? (답은 당연히 A)

남녀가 소개팅하는 장면. 자막이 나온다

식사 후 남자가 여자에게 껌을 줬다. (여자가 갑자기 남자의 빰을 때린다)

무슨 껌이었을까? A. 내츄럴치클 B. 초산비닐수지껌 (답은 당연히 B)

방송되지 않았지만 이런 라디오 광고도 제시했다.

남자의 독백이 들린다.

내가 좋아하는 그녀는 늘 친구와 붙어 다닙니다

어쩔 수 없이 같이 잘해주다보니 마음을 전할 길이 없었습니다

셋이서 저녁을 먹기로 한 날 비정해지기로 했습니다

식사 후 그녀에겐 내츄럴치클껌을

그녀의 친구에겐 초산비닐수지껌을 주었습니다...

내츄럴한 차별. 내츄럴치클

요점을 말하면 내츄럴치클은 '초산비닐수지 대신 천연치클로 만들어서 어디가 얼마나 좋고 어쩌구 저쩌구' 라는 긴 말을 건너뛰고 핵심으로 날아가서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껌은 내츄럴치클이다' 라고 바로 이야기한 것이다.

'발상의 축지법'을 활용한 '내추럴 치클' 껌 CF 중 한 장면.
'발상의 축지법'을 활용한 '내추럴 치클' 껌 CF 중 한 장면.

▶개그맨과 광고인들의 공통점 '발상의 축지법'

개인적으로 개그맨들의 발상과 광고인들의 발상에 공통점이 많다고 본다. KBS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인 '두분 토론'에서 '남하당' 박영진이 '여당당' 김영희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

"소는 누가 키워?"

이 말에는 많은 말들이 생략되어 있다. "당신이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 싶으면 농사 일은 누가 해? 밭은 누가 갈아? 감자는 누가 캐고? 고추는 누가 따고?" 등등. 이 표현 또한 바로 날아가 핵심을 건드리는 축지법이 보인다.

공교롭게도 처음 꺼낸 말도 "바닥에 던져놔"였고 마지막으로 꺼낸 말도 "소는 누가 키워?"였는데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필자는 세상의 여자들을 존경하며 이런 말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완전 애처가다. 믿거나 말거나!

백만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marc@oysterp.com
블로그 blog.naver.com/bmangi

※ 오·감·만·족 O₂플러스는 동아일보가 만드는 대중문화 전문 웹진입니다. 동아닷컴에서 만나는 오·감·만·족 O₂플러스!(news.donga.com/O2) 스마트폰 앱으로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