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민심, 현장을 가다]<2>대기업-中企‘동반성장’ 온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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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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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가 후려치고 툭하면 설계변경… 4년 납품의 끝은 압류딱지뿐

세계 10위권의 선박 건조 물량을 자랑하는 A사는 과감한 투자와 공격적인 경영으로 급성장해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데 A사의 협력업체 6곳은 지난해 줄줄이 문을 닫고 A사를 상대로 200억 원대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을 제기한 업체인 성공이앤디 관계자는 “A사의 횡포 때문에 남은 것은 압류 딱지와 사채뿐”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 일할수록 망해가는 중소기업

성공이앤디는 2007년 A사의 사내(社內) 하청업체로 출발해 연간 20억∼3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러나 A사가 원가에 못 미치는 단가를 강요하는 바람에 매출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손실이 커졌다고 이 회사는 주장했다. 회사 관계자는 “A사에서만 일거리를 받다 보니 손실이 커져도 항의하지 못하고 A사에 급전을 가불해 쓰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결국 직원 월급도 못 주고 사채를 포함해 4억 원의 빚더미에 앉게 됐다. 내 집도 압류됐다”고 말했다. 함께 소송 중인 기업들도 “A사는 계약서를 쓰기도 전에 먼저 작업부터 하게 하거나 한 달에 열 번 이상 설계 변경을 요구해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고 주장했다.

A사 관계자는 “협력업체들이 인력 운용이나 제작을 잘못해 손해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 그들 말대로라면 70∼80개에 이르는 협력업체들이 모두 망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박해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도 지난달 A사의 협력업체 3곳이 또 문을 닫았다.

대형 건설사의 1차 협력업체에 수도용 밸브를 납품하는 B사는 원청업체의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15년 가까이 거래를 계속했지만 1차 협력업체는 4년 전부터 대금의 20∼30%만 주고, 심하면 8개월짜리 어음을 끊어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B사가 “돈을 안 주면 공장을 돌리기 힘들다”고 호소하자 1차 협력업체는 “너희가 뭔데 건방지게 일을 한다, 안 한다 하느냐”라는 폭언과 함께 난데없이 “14년 전에 빌려간 금형(金型)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수시로 금형을 받아와 주물을 뜬 뒤 다시 돌려주는 방식으로 일을 하는 B사 측은 “금형을 돌려줬다는 증거도 없으니 힘없는 우리가 뒤집어 쓸 수밖에 없다”며 하청업체의 설움을 호소했다.

○ 격차 확대에 현장분위기 흉흉

대기업은 사상 최고의 실적을 내는데도 중소기업의 고통은 갈수록 커지는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산업현장의 민심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그룹, 포스코 등 수출을 주도하는 대기업 56곳은 지난해 직원 1인당 당기순이익이 1억 원을 넘어섰다. 그러나 수출 대기업의 과실이 협력업체를 포함한 중소기업으로 퍼지는 트리클 다운(trickle down)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기업을 제외한 모든 산업 주체의 상대적 박탈감은 점점 커지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대기업 총자산 증가율은 2009년 7.69%에서 2010년 10.58%로 2.89%포인트 증가했다. 반면 같은 기간 중소기업은 9.64%에서 8.66%로 0.98%포인트 줄었다. 기업이 피부로 느끼는 경기 현황을 나타내는 기업경기실사지수(BSI)도 한은, 대한상공회의소, 각종 민간연구소 등 조사기관을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가 나타나고 있다.

건설업계를 보면 윗목(대기업, 중견기업)에서 비롯된 ‘동맥경화’ 탓에 벼랑 끝에 몰린 중소기업의 어려움이 여실히 드러난다. LIG건설, 삼부토건, 동양건설산업 등 중견 건설업체들이 잇따라 기업회생절차나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이들로부터 일감을 받아 기업을 유지해온 중소 전문건설업체들의 경영난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최근 기업회생절차를 시작한 한 중견기업에 건설자재를 납품하다 부도 위기에 몰린 전문건설업체 C사의 사장은 “중견 건설사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지면서 채권, 채무가 동결됐고 이에 따라 전문건설업체들이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십억 원까지 대출금을 물어주게 됐다”고 하소연했다.

돈뿐만 아니라 대기업에 인력을 빼앗긴 중소기업도 많다. 대기업 계열사에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D사는 지난 4년간 30여 명이 입사했지만 이 중 20여 명이 몇 달 만에 회사를 떠났다. 신입사원을 뽑아 6개월 정도 훈련시켜 놓으면 해당 대기업 계열사가 경력공채로 쓸 만한 이들을 계약직으로 싹쓸이해 간 것이다. D사 관계자는 “해당 대기업이 ‘연봉을 더 주겠다’며 번번이 우리 직원들을 데려가기에 관련 부처에 신고한 적이 있다. 그런데 ‘절차상 하자가 없는데 왜 신고했느냐’는 추궁만 들었고, 얼마 뒤에는 신고했다는 사실까지 대기업에 흘러들어가 곤욕을 치렀다”고 말했다.

영세, 중소기업들은 오늘날의 경영 현황이 ‘돈을 버는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라며 입을 모았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올해 2월 대기업에 납품하고 있는 175개 중소기업을 조사한 결과 원자재 가격 인상분이 납품가에 반영됐다는 기업은 35.4%에 그쳤다. 대기업 납품업체의 절반 이상(55.6%)은 그 이유로 ‘대기업의 납품가 인상 거부’를 들었다.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박승헌 기자 hparks@donga.com  
나성엽 기자 cpu@donga.com  
▼ 中企 “정부 ‘상생협력’ 주문은 립서비스일 뿐” ▼
징벌적 손배제? “기술 뺏겼지만 보상 못 받아”…


“정부가 중소기업을 지원한다고 했지만 도대체 무슨 혜택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다 립서비스 아니었나 싶다.”

정부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협력을 외친 지 반 년 이상 지났지만 중소기업계의 표정은 밝지 않다. 이명박 대통령이 중소기업계 인사들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고, 여당 대표가 경기 파주시의 중소기업단지를 방문해 격려하고, 사회 각계에서 중소기업 챙기기에 나서면서 대기업들이 잇따라 동반성장 대책을 내놓았지만 달라진 건 많지 않았다.

납품단가연동제 도입은 무산됐고 차선책으로 중소기업협동조합에 달라고 요구했던 납품단가조정 협상권은 신청권으로 격하되는 등 중소기업계의 목소리가 제대로 먹히지 않아 김이 샜기 때문이다. 서병문 주물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협상권’을 주면 집단협상이 가능해 힘을 가질 수 있지만 ‘신청권’은 협동조합이 신청만 할 수 있을 뿐 협상은 대기업 눈치를 봐야 하는 중소업체들이 대기업과 일대일로 해야 하는 구조”라고 주장했다.

그러니 현장의 체감만족도 역시 낮은 편이다. 신재생에너지 기술 개발업체인 BI에너지는 “없는 살림에 연구개발(R&D)에 힘을 쏟아 부으며 개발한 신기술을 지난해 거대 공기업에 빼앗겼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회사 박병일 대표는 “백방으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어느 누구도 행동으로 보여준 건 없었다”고 말했다.

물론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정책이 아주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동반성장위원회가 출범했고 우여곡절 끝에 동반성장지수도 도입하기로 했다. 여기에 △하도급법 개정안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 기준 마련 △대기업슈퍼마켓(SSM) 규제법인 유통산업발전법과 대·중소기업상생협력촉진법안 통과 등 ‘작은 결실’도 봤다.

하지만 중소기업계는 염증이 오래된 만큼 처방도 정교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어음결제 등 거래 관행도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기술 탈취, 인력 빼가기, 무차별적인 중소기업 영역 침해 등도 여전하기 때문에 제도 몇 가지로 바로 상황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김진무 한국골판지포장공업협동조합 전무는 “어렵게 도입한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도 제조 부문에서는 대기업 진출을 막을 수 있지만 영업과 유통 부문에서 일어나는 대기업의 횡포를 막지 못하는 허점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정부가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을 위해 마련한 정책들을 어떻게 운용하고 어떻게 보완할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인우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동반성장을 하나의 문화로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대기업 오너들의 의지와 함께 납품받는 기업의 실무 구매담당자의 태도 변화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승헌 기자 hpar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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