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영화제를 섭렵한 인물…영원한 영화청년 ● 허샤오시엔 감독, 티에리 프레모 칸 영화제 집행위원장과 타이거 클럽 인연
부산국제영화제(PIFF)는 이제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성장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가 10월 7일 개막했다. 9일 간 열리는 이번 영화제에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는 100여 편의 월드프리미어를 비롯해 308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1996년 시작된 부산국제영화제는 1985년과 1977년 각각 열리기 시작한 도쿄국제영화제나 홍콩국제영화제를 앞질렀고, 이제 200여명의 영화인들과 20만 명의 영화 팬들이 찾는 아시아 최대 영화제로 성장했다.
15년간의 성장에는 늘 김동호(73) 집행위원장이 있었다. 그는 당시 영화불모지였던 부산에 국제영화제를 만들고 이끌어낸 '아버지'같은 존재다. 15년 전 "패가망신하지 않겠느냐"는 부정적인 시각을 뒤로 하고 그는 지금의 성과를 이뤄냈다.
김동호 위원장이 이번 영화제를 끝으로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사퇴의사를 밝혔다. 영화인을 비롯한 영화팬들은 '아버지'의 퇴임이 마냥 아쉽다. 약 20년간 문화공보부에 몸담았고, 영화진흥공사 사장과 문화부 차관을 거치며 전형적인 관료의 길을 걸었지만, 그는 영화인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흔치않은 성공을 일궈낸 관료이기도 하다.
부산국제영화제 측에서는 이번 영화제 기간동안 김 위원장이 영화인들의 사진을 비롯해 다양한 해외영화제를 다니면서 찍은 사진을 전시하고, 그가 출간한 영화제 관련 서적 '세계영화제 기행'의 출판기념회를 열 예정이다.
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부산에서 김동호 위원장을 만났다. 70대인 그는 까마득히 손아래인 기자의 질문에 정확한 수치와 용어를 헤아려 존댓말로 전하는 '어른'이었고, 일년에 반 이상 해외에 나가 있는 강행군 속에서도 열정을 담아 사진을 찍고, 스마트폰과 아이패드에 열광하는 '청년'이었다.
▶15년 만에 자신이 일군 PIFF에서 은퇴
PIFF의 창립과 기틀을 다지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김동호 집행위원장. 동아일보 자료 사진-이번 사퇴 발표 전에 이미 10회 영화제부터 사퇴에 대한 언급을 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서운해 하는 분들이 많던데요.
"언젠가는 그만둬야 하는데 그 시기를 잡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제가 가장 집념을 두고 추진한 게 부산영상센터 '두레라움'이었는데, 머지않아 개관을 앞두고 있어요. 이제는 기반을 확보했다고 판단해서 젊은 사람들이 맡아서 다음 영화제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올해 그만두는 게 가장 적기라고 판단한 거죠."
-위원장께서 가진 인적 네트워크가 부산국제영화제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을 텐데요. 그만두시고 나면 영화제 측에서는 어느 정도 어려움이 있을지도….
"그건 계속 새로운 네트워크를 구축하면 되고, 또 정말 중요한 계기에는 혹시 필요로 한다면, 제가 도와주면 되지 않겠는가… 백의종군하거나 무료자원봉사로요. 허허."
-위원장으로서는 마지막 영화제이신데, 느낌은 어떠신가요.
"그냥 평소와 마찬가지예요. 다만 저는 15년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사진전을 하니까 그동안 열심히 찍은 사진을 정리해서 털어버린다는 게 의미가 있고요. 또 하나는 그동안 세계 어느 나라 영화인보다 해외영화제를 저만큼 많이 다닌 사람 없을 텐데, 그걸 정리하는 차원에서 영화제 관련 책을 준비했습니다. 영화제 기간에 책이 나와 '페어웰 파티'에서 출판 기념회를 하거든요. 사진과 책이 나오면 이제 저는 훌훌 털고 작별하는 거죠.(웃음)"
-이번 15회 영화제에서 주목할 만 한 건 뭔가요?
"가장 중요한 건 308편 영화 중에서 세계 처음으로 공개하는 월드프리미어나 인터내셔널 프리미어가 각각 103편과 52편으로 역대 최다예요. 새로운 영화들을 가져올 수 있었다는 점이고, 그만큼 영화제의 위상도 높아졌다는 거죠."
-부산국제영화제는 특히 게스트가 화려하잖아요.
"올해는 어느 때보다 더 화려한데요. 줄리엣 비노쉬가 왔고, '색계'에 출연했던 탕웨이, 또 할리우드 스타 윌렘 데포와 아이쉬와라 라이라는 인도 배우는 미스월드 출신인데 10대 미녀에 포함된대요(웃음). 또 처음 찾는 감독으로는 올리버 스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있고, 또 개막작 가져오는 장이모나 차이밍량이나 허샤우시엔 감독… 특히 스페인의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경우 이번에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도 받았는데 프랑코 시대 영화를 많이 만들었던 사람이죠."
-해외 게스트를 초청 할 땐 위원장님 역할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건 없고, 줄리엣 비노쉬 같은 경우는 2년 전 공연차 한국에 왔을 때 특별히 단독 면담해서 초청했고 이후 칸 영화제 가서 두 번 만나서 다시 초청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영화제 관련 기자회견을 열기 직전에 온다고 통보가 왔었고. 지난해 방문한 코스타 가브라스 같은 감독은 세 번의 점심식사 이후 초대했고요."
▶세계적인 영화인들 부산에 오면 김 위원장과 소주파티
- 대만의 허샤오시엔 감독 등과도 친분도 깊다고 하던데요.
"허샤오시엔 감독은 타이거클럽이니까 매년 오다시피 했죠. 허샤오시엔 감독이 2001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처음 방문했을 때 당시 심사위원들과 술 마시면서 친해졌어요. 그리고 다음해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다시 만났죠. 거기서 허샤오시엔, 샤이먼 필드 당시 로테르담 영화제 집행위원장, 언론인 피터 반 뷰렌 이렇게 모여서 매일 저녁 12시에서 새벽 3시까지 술 마시다가 클럽을 만들자고 했어요. 호랑이 영화제 왔고 내 이름 끝 자가 호랑이(虎)이니까 타이거 클럽을 만들자…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은 그 때 없었지만 앞서 부산에서 같이 술 마셨으니까 자기도 자격이 있다고 해서 다섯 명이 타이거 클럽에 속하게 됐죠. 나이는 제가 젤 위라서 빅브라더가 되고(웃음). 타이거 클럽이 부산에 오면 밤 12시에서 새벽 4~5시까지 서로 마이크 잡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술 마시고 2차 가고요. 세계 최고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망가져서 돌아가는 곳은 부산영화제밖에 없을 거예요."
-문화공보부 주사로 시작하셔서 영화진흥공사와 예술의 전당 사장, 문화부 차관 등 전형적인 엘리트 공무원의 길을 걸으셨는데요. 영화인을 포함해 예술 하는 사람들은 왠지 공무원조직과는 어울리기 힘들어 보이거든요.
"원래 문화공보부라는 부서가 대민활동이 많은 부서 아녜요. 누군가 공연한다고 하면 빠지지 않고 갔죠. 자유극장에 가서 윤석화씨가 '신의 아그네스' 등장했을 때 술 한 잔 사주고, 다음에 박정자씨 나오면 또 한 잔 사고…그러다 영화진흥공사 가서도 연세 많은 영화인부터 젊은 감독까지 계속 매일 만나고 술 마시고 하면서 아래 위 관계없이 친해졌으니까요."
-관련된 조직에 있다고 모두 친해지거나 존경받는 건 아닐 텐데요.
"비결은 특별이 없어요. 소탈하게 성심껏 대하고 저녁이든 술이든 같이 어울리다보면 친해질 수밖에 없죠. 외국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문화에 동화시켜가는 거죠. 오면 포장마차 데려가고 한국의 술 나누는 습관이다 해서 잔주고 받게 하고 (술잔을 머리위에 얹는 포즈를 취하며) 먹고 러브샷 시키고 폭탄주 나누면 그 사람들도 동화돼 버리니까(웃음)."
-주량이 엄청나시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영화진흥공사 사장 할 때는 남양주 영화촬영소 때문에 100명의 주민을 설득해야했어요. 이들을 상대로 폭탄주를 돌려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물론 저는 뒤로 빠지고(웃음)."
-그렇게 드셨는데도, 몸은 괜찮으셨나요?
"아무리 술을 많이 마시고 새벽 4시에 집에 들어가도 5시면 일어나서 운동하고 뛰어 돌아다녀요. 그 힘으로 이렇게 술을 마시고 돌아다녀도 지탱할 수 있었겠죠. 그런데 2006년부터는 딱 끊었어요. 우리나이로 70인데 이렇게 돌아다니면 안 된다 싶더라고요. 그래도 술자리에는 참석합니다. 저는 맹물을 마시고 다른 사람들은 소주를 마시니까 저는 새벽 1시, 2시까지 엄청난 양의 물을 마시는 거죠.(웃음)"
-영화제가 열렸던 지난 15년 동안 기억에 남는 일들은 꼽으신다면?
"수많은 편견 속에서 순전히 오기로 영화제를 이끌어왔어요. 1회 영화제 때 야외 상영장에서 대형스크린이 올라가는 순간은 굉장히 감동적이었고 절대 잊을 수 없죠. 또 길거리에서 술 마셨던 기억이나 남포동에서 택배 오토바이 뒤에 타고 돌아다녔던 일들도 하나의 추억으로 남았고요. 무엇보다 2001년이 영화제 6회 째였는데 티에리 프레모가 칸 집행위원장으로 부임했고, 디이터 코슬릭이 같은 해에 베를린 집행위원장으로 모리스트 하우델런도 베니스집행위원장도 막 부임했거든요. 그래서 삼고초려하듯 모셨고 부산국제영화제가 이들 세 명이 부임하자마자 처음 방문하는 영화제가 됐어요. 3대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 부산을 찾았다는 건 영화제의 성과를 직설적으로 상징하는 사건이었죠."
부산국제영화제 구석구석에 김 위원장의 손길이 닿아 있다. 스포츠동아 임진환 기자
▶"PIFF와 한국영화계 밀고 당기며 영화부흥 이끌어…"
-부산국제영화제가 한국영화의 해외 진출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영화제와 한국영화가 서로 상호 상승적으로 작용하면서 함께 컸다고 생각하는데요. 특히 해외 진출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가 큰 역할을 했다고 확신하죠. 단적인 예로 부산영화제가 생긴 뒤 칸에서 한국영화를 골라가기 시작한 1998년부터는 매년 4~5편 씩, 지난해에는 10편의 한국영화가 소개되고 수상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부산국제영화제의 공헌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로선 영화제가 생소했을 텐데요.
"영화제에 관심을 갖고 있을 때였는데 1995년 지금 공동위원장으로 있는 이용관 교수, 수석프로그래머를 하고 있는 김지석 교수와 전양준 평론가가 영화제를 제안했죠. 세 사람의 면면을 짚어보니까 열정이 있는 것 같아서 덥석 한다고 했고요. 그랬다가 15년간 고생한거죠.(웃음)"
-영화제 초기에는 예산이 부족해서 사비로 충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당시에 대학교수도 하게 되고 하면서 마침 돈을 벌 곳이 생겼는데, 이용관 김지석 이 사람들은 다 신용불량자가 됐죠."
-영화제를 처음 만들 당시 이만한 성공을 예상하셨나요?
"원래 처음 시작할 때 생각했던 모델은 이탈리아의 '페사로 영화제'였어요. 그렇게 작지만 알찬 영화제를 만들자고 했던 건데 제가 끼어들다 보니 달라진 거죠. 제가 기왕 할 거면 큰 영화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해서 야외 상영을 위한 대형 스크린도 스위스에서 빌려오고… 이렇게 되다 보니 (영화제 규모가) 커진 거죠."
-자금 때문에 허덕이는 데 이유가 있었군요.(웃음)
"그렇죠. 1회 때 22억원이 필요했는데 3억만 부산시 지원을 받고 4억은 극장 수입으로 충당하고, 나머지 15억은 스폰서로 충당한거죠. 그런데 이용관 교수나 다른 프로그래머들은 정재계 쪽으로 관계가 없으니까 제가 아는 사람 만나고 다니고 그랬죠."
-당시 예산이랑 지금이랑 비교하면 5배가 커진거죠?
"허허, 그런 셈이죠. 99억 정도니까."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뭘까요.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프로그램이에요. 유럽이나 미주에 있는 사람들이 멀리 부산까지 오려면 얻는 게 있어야 하거든요. 세계 수많은 영화제가 있고 아시아권에서도 우리보다 10년 먼저 생긴 도쿄 영화제, 20년 먼저 생긴 홍콩 영화제가 있지만 그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나름의 색깔, 아이덴티티가 있어야 해요. 저희는 아시아의 신인감독, 새로운 영화를 찾아내서 세계에 소개시키는 것에 역점을 뒀어요. 그래서 중국의 지아장커 감독이나 대만의 차이밍량, 태국의 위시트 사사나티앙 같은 감독들은 부산을 통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됐고요."
-위원장께서 가장 신경 쓰신 부분은 뭐였나요?
"뭐, 돈 구해오는 일이죠. 어차피 영화제하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1회 끝나고 나서는 정부 예산 투자를 통해 3회 때 7억 예산을 받았고 4, 5회 때 10억을 받았어요. 그런데 영화제에 3회 이상은 지원 하지 않는다는 기획예산처 의지가 워낙 확고해서 그걸 깨는 게 무척 힘들었어요. 그 후로도 매년 정부예산 따는 게 쉽지 않았죠. 스폰서 구하기도 쉽지 않았고요."
-처음엔 부산에서 영화제를 한다는 것에 부정적인 시선이 많았는데요.
"저는 부산이어서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서울이었다면 도시 규모가 워낙 크니까 어디서 뭐가 일어나는 지도 모르고 분위기 형성이 어려웠을 거예요. 외압을 받지 않기가 쉽지 않았을 거고요."
PIFF는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개최됐고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동아일보 자료 사진
▶"부산이기에 영화제 성공했다…정치적 중립도 한몫"
-영화제의 정치적 중립을 특히 강조하신 걸로 압니다.
"1회 때부터 모든 정치인이나 관의 축사 이런 걸 모두 없애 버렸죠. 오직 부산시장 개막선언만 하는 것으로 1회 때부터 관습화 시켜놨기 때문에 지금은 누가 와도 편해요. 1998년 대통령 선거 있을 땐 야당 대통령 후보가 개막식에 참석해도 소개를 하거나 인사말 기회 안줬고, 여당 대통령 후보가 남포동에 와서 무대 오른다는 것도 막았어요.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영화제가 되려고 노력했죠. 그것이 영화제를 성공시킨 요인이기도 하고, 다른 영화제와 달리 관이나 정치적 입김에서 흔들리지 않고 동일한 기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죠."
-부산국제영화제 이후 굉장히 많은 영화제가 생겨났습니다. 과잉이라는 비판도 있는데요.
"제가 보니까 영화제가 70개 정도 되고, 국제영화제라는 이름이 붙은 게 22개가 되더라고요. 정부지원 받는 영화제는 6개 정도 있고요. 그렇다면 좀 많다고 볼 수 있죠. 지역 영화제는 장단이 있어요.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영화는 주로 상업영화니까 비상업영화, 독립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영화제밖에 없잖아요. 그러나 영화제가 고유한 색깔과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데 그게 없으면 예산 낭비라던가 지방자치 단체장들의 홍보 역할만 하는 것에 치우칠 수 있죠."
-위원장직에서 물러나신 후 계획도 궁금합니다.
"제가 지나온 삶의 1기가 공직생활이었고 2기는 영화인 혹은 영화행정가 정도로 본다면 3기는 예술인으로 살고 싶어요. 예전에 서예를 했거든요. 국전에서 입선도 했었는데, 다시 서예를 시작하면서 좀 더 영역을 넓혀서 유학까지 해볼까 생각해봤거든요. 그리고 20년 가까이 영화에 몸담았으면 영화 한 두 편을 만들어야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있죠. 현장에서 예술을 직접 체험하는, 예술인이 되는 게 제 3의 인생이 아니겠는가…. 너무 욕심이 많지만. 하하."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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