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집중분석]이민정 “여자가 프러포즈 받을 때 우는 이유는…”

동아일보 입력 2010-09-09 15:04수정 2010-09-09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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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 주연 배우 이민정. 양회성 기자

'보는 내내 다음 장면이랑 대사가 빤히 예상되고, 보고 나면 기억에 남는 것 하나 없는, 시시하고 지루한 오두방정 로맨틱코미디이겠거니.'

16일 개봉하는 '시라노;연애조작단'(12세 이상 관람가) 시사회장에 앉은 기자의 마음은 불순했다. 고등학생 때 크리넥스 통을 끌어안고 봤던 제라르 드빠르디유 주연의 프랑스 영화 '시라노'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설명도 곱게 들리지 않았다.

'유치하고 억지스럽게 인용했겠지. '시라노' 정말 감동이었는데. DVD 구할 수 있을라나…?'

결론부터 말하자. 잘못된 선입견이었다. 이 영화, 재미나다. 최다니엘 같은 꺽다리 미남자가 여자 앞에만 서면 입이 굳어 연애를 못한다는 비현실적 설정에만 눈을 살짝 감아주면 2시간이 언제 흐른 줄 모르게 낄낄대며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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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여주인공 희중 역의 이민정(28)은 이 영화를 연출한 김현석 감독에 대해 "사랑을 글로 배운 것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시구자인 스타 여배우와 야구심판의 운동장 한복판 키스 신으로 끝났던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년), 바에서 호감 가득한 눈빛만 나누고 스쳐지나갈 뻔했던 남녀가 때맞춰 터져준 스프링클러 아래에서 우산을 함께 쓰는 '므흣한' 장면으로 끝나는 '광식이 동생 광태'(2005년)가 김 감독이 각본을 쓴 영화들이다. 실전 경험보다 이론에 '빠삭할' 가능성이 다분한 그가 이번에 빚어낸 이야기도 현실보다는 이상에 기운 판타지 로맨스다.

영화 ‘시라노;연애조작단’ 사진.

하지만 '누구든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을 만큼 완벽하게 낭만적인 상황을 유료로 연출해주는 연애조작단'이라는 설정의 억지스러움은 군살 없는 에피소드들이 만들어내는 경쾌한 리듬감으로 충분히 가려진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여러 번 배꼽 잡게 만들 만큼 코믹하면서도 '오버'가 없어 보기 거북하지 않다. 슬랩스틱 코미디가 아니라 깔끔 담백한 시트콤에 가까운 것.

이민정이 연기한 여주인공 희중은 연애조작단 대표인 옛 연인 병훈(엄태웅)과 연애조작을 의뢰한 새로운 남자 상용(최다니엘)이 꾸민 '작전'의 표적이다. 비현실적으로 맑고 커다란 그의 두 눈을 바로 앞에 두고 보니, 영화의 억지스런 설정에 역설적으로 현실성을 더할 수 있었다. 그래, 이런 여자 앞이라면. 아무리 최다니엘이라도 혀가 굳을 수 있겠지.
-첫 주연 영화인데, 소문이 좋다.
"엊그제 어떤 친구가 전화하다가 '야, 이거 하려고 여태 애썼잖아' 말해주더라. 감동했다. 그런데 자꾸 '좋게 봤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기대를 하게 된다. 기대하면 실망하기 쉬운데. 어떡하나 싶다."

-사랑에 아파 본 경험 있는 남자라면 대부분 공감할 영화일 듯.
"하하. 남자들이 좋아할 로맨틱코미디라고 누가 그러더라."

-영화에서 병훈은 자기가 잘못해 놓고 그걸 인정하기 싫어서 희중에게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이며 화를 낸다. 개인적으로 그 장면 보면서 반성 많이 했다.
"남자의 이기적인 자기변명 탓도 있겠지만…. 글쎄, 그만큼 병훈이 희중한테 속으로 너무 미안했던 것 아닐까."

연인이었던 병훈과 희중은 속 좁은 병훈의 바보 같은 행동 탓에 이별한다. 이들의 낭만적 클로저(closure)는 남자 관객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건드릴 '시라노…'의 뇌관이다. 세상 그 어떤 남자가 "나는 정말 멋진 모습으로 그녀를 떠나보내 줬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김현석 감독은 버스 지나간 뒤 땅 쳐 봤던 멍청한 남자들이 엇비슷하게 공유하는 회한을 달콤한 판타지로 어루만진다.

영화 ‘시라노;연애조작단’ 사진.

-헤어진 연인 몰래 '행복해지라'는 바람을 전해주는 장면. 인상적이었다. 마음이 '짠' 하더라.
"와하하하. 남자랑 여자는 그런 점에서 참 많이 다른 것 같다. '그렇게 미안하고, 그렇게 나를 위해 기특한 짓을 할 줄 아는 애가, 도대체 왜 헤어졌고, 있을 때는 왜 그렇게 했을까.' 여자 관객들은 그런 얘기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민정 씨가 공감했던 에피소드나 대사는….
"희중이는 시니컬한 사람이다. 그럴 수밖에. 누구나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게 되면 비슷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사소한 균열이 쌓여서 그렇게 된 걸까. 왜 멀어지게 됐을까.' 자꾸 생각하게 된다. 나도 그런 적이 있고. 그런데 생각해 보면 결국 정말 영화 속 대사처럼 그냥 '조금 더 사랑했으면 되는 것'이었다. 많이 공감했다. 사람들은 헤어지고 나서 '왜 헤어졌는지 모르겠다'고들 흔히 얘기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저 그 사람을 덜 사랑한 것일 뿐이었던 거다."

-혹시 남성의 시선으로 설정된 상황의 디테일을 감독과 논의해서 조정한 장면은 없었나.
"희중과 병욱이 오랜만에 재회해 술을 마신 밤의 상황. 원래 시나리오에는 키스를 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남자는 키스하려 하고 여자는 애써 몸을 빼려 하는 상황으로 하자고 강하게 주장했다. 감독님은 '태웅 씨랑 키스하기 싫으니까 그러느냐'며 웃더라. 하하. 절대 아니다. 희중이 관객으로부터 연민 어린 공감을 얻으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변에서 상용이 희중에게 프러포즈를 하는 장면도 원래는 희중이 반지를 받으며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보다는 '믿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서 믿는 것'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을 흘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감독님께 제안을 했다. 병훈이 남겼던 '믿음'에 대한 응어리가 그렇게 풀리는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프러포즈를 받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건 기쁘고 행복해서일까. 마음속에 남겨뒀던 옛 남자를 비로소 온전히 떠나보내는 눈물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 ‘시라노;연애조작단’ 사진.

-원작은 봤나.
"책 조금 보다 촬영 들어갔다. 이번 영화는 리메이크가 아니다. 리메이크라고 하면 더 원작을 안 본다.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알게 모르게 스스로 제한을 두게 되지 않을까. 이제 시간 날 때 슬슬 봐야지."

-드라마 '꽃보다 남자' 때도 원작 일본 드라마는 안 봤나?
"안 봤다. 궁금해서 인터넷에서 사진이랑 동영상을 본 적은 있다. 나중에 그마저도 '안 볼 걸 그랬다'며 후회했다. 연기할 때 그 사진의 느낌이 자꾸 들어가는 느낌이 있어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드라마에서 마음 너그러운 여자친구, 예쁘고 착하고 완벽한 며느리 역할을 했다. 실제로 그런가?
"아니 그렇게 물으면 나는 당연히 '그렇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하하. '아니에요 저는 나쁜 구석이 있어요' 이럴 수는 없는데. 드라마 '그대 웃어요' 캐릭터를 어른들이 참 좋아해 주셨다. 1회부터 보면 '그대 웃어요'의 주인공 정인은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다. 개과천선한 구석도 있는 거지. 완벽한 며느리라기보다는 철없는 아이가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였다고 본다. 아픔을 겪으면서. 잘 맞는 캐릭터이긴 했는데, 평소에 그렇게 까불까불 애교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희중에 가깝다. 성격에 조금은 시니컬한 면이 있다. 겉으로 티는 잘 안 내지만. 생각이 많고.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쿨하게 살 것 같은 이미지'가 있나 보던데, 사실 안 그렇다. 과거에 늘 연연해 하는 편이다. 희중이가 그런 사람이라 100% 공감했다."

-드라마 '그대 웃어요' 가끔 보면서 굉장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나' 했다.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한테도 다 진심으로 잘 대해 주는 천사 같은 미녀라니.
"정말 시니컬하네. 정인이 같은 사람, 있을 수 있다. 그런 순수함을 가진 사람. 나도 누군가 정말 사랑하게 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 주연 배우 이민정. 양회성 기자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한다. 그런데 액션이나 스릴러도 시켜주면 잘 할 자신 있다. 사실 별로 여성스러운 스타일은 아니어서. 방방 뛰고 몸을 많이 쓰면 신나 하는 타입이다. 이번 영화 때는 수동기어 스쿠터 타는 법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남자한테 워낙 고백을 많이 받아봐서 이번 영화 같은 상황이 별로 낯설지 않았을 것 같은데.
"별로 보기보다 안 그렇다."

-여자들은 프러포즈 할 때 영화에서처럼 재미있는 이벤트를 해주면 정말 그렇게 좋아하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렇지 않지?
"하하. 되게 안심하네. 나에게 동의를 구하면 뭐하나. 내가 모든 여자의 기준점이 아니지 않나."

-말이 길어지고 상황이 길어지면 진심이 묻힐 때가 있지 않나. 본질이 흐려지고.
"그런 교훈도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연애는 결국 조작보다는 어설픈 날것의 진심이 더 통한다는 것. 연애조작단 얘기지만 연애조작 권하는 얘기는 아니니까. 연극 끝나고 나서 프러포즈 하는 남자들 있지 않나. 만약에 여자가 그 상황에서 고민하다 '노'를 하면 어떨까. 예전에 어떤 연극 공연 끝나고 그런 일이 있었다. 여자가 정말 많이 망설이더라. 보다가 내가 죽겠더라. 하하. 어떡해 어떡해 하고 있는데 여자가 일단 받기는 받더라. 내려가서 거절했을 것 같다. 이벤트라는 게, 5년쯤 사귀고 둘이 은연중에 합의가 된 상황이면 괜찮겠지만, 대중 앞에서 느닷없이 선택을 강요하면 누구나 당황하게 될 것 같다."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 주연 배우 이민정. 양회성 기자

-스타덤에 오르는 속도가 그리 빠르지는 않은 것 같은데.
"많은 사람들이 '아는 여자' 한 장면에 단역 출연했던 얘기를 하는데, 나는 그 때 이쪽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 장진 감독님 강의 듣다가 '영화 경험 해 볼래?' 하셔서 갔던 거다. 데뷔는 2006년에 했다고 보는 게 맞다. 회사에 계약이 됐고 그 때부터 작품이라는 걸 준비하기 시작했으니까.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속도는 느린 것도 아니고 빠른 것도 아닌 것 같다. 물론 '꽃남' 터지기 전까지는 암울했다. 캐스팅이 됐다가 도중에 갈리기도 하고. 그 작품, 말에서 떨어져 가면서 한 달 동안 승마를 배우면서 준비하고 있던 거였는데. 2007년 12월 31일 새해 카운트다운 넘어갈 때 상황이 지금도 생생하다. 전화를 받았는데 카운트다운 소리가 시끄러워서 '뭐라고? 뭐라고?' 물어봤다. 사람들이 '와! 해피 뉴 이어!' 외치는 순간 '내일부터 너 촬영 안 나와도 된다고!'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31일에 들었으면 '그래 뭐, 새해부터 다시 잘 하자' 할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욕 나왔다. 1월 3일까지 집에 틀어박혀서 울었다. 관둘까도 잠깐 생각하고. 친구들이 '너는 왜 안 떠?' 하는 소리 되게 많이 들었다. 하지만 '고생했다'고 하기에는 어중간하다."

-덕담 하는 기분이지만 은근하게 오래 가는 게 더 좋지 않나.
"하하. 그런 것도 있겠지. 내공이 안 쌓인 상태에서 확 뜨면 꼭 좋지만도 않을 거다. 무조건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 이만큼씩 얻어가면서도 아 이만큼씩 잃고 있구나, 느끼는데. 정말 확 얻으면서 확 잃는 걸 느끼면 그 타격이 엄청날 것 같다. 우울증도 올 것 같고. 허무한 것도 있을 것 같고. 지금도 돈을 그냥 버는 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 많이 한다. 모든 소득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다."

-대학 들어갈 때는 배우 하겠다는 생각을 안 한 건가.
"연출을 하고 싶었다. 별로 끼 있는 아이는 아니었거든. 초등학교 때 최불암 선생님 극단에서 연극을 해보긴 했다. 그걸 마지막으로 한 번도 사람들 앞에 나서서 뭔가 해본 적이 없다. 대학 와서도 연극 공연 보는 건 좋아했지만 연예인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건 정말 특출한 사람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우우와' 하는 사람들. 그런데 내가 뭐. 그런 게 있나 했다. 대학 1~3학년 때 연극을 하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마음먹은 시점이 너무 늦은 거지. 그냥, 한 계단 씩 올라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좋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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