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집중분석] ‘영도다리’ 전수일 감독 “청소년들이 봐주길 바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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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5일 17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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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도다리\' 전수일 감독.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영화 \'영도다리\' 전수일 감독.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열아홉 살 인화가 말없이 산처럼 부푼 자신의 배를 바라본다. 인화는 영도다리 밑에서 혼자 산다. 소녀의 곁에는 부모도 없고 아기의 아버지도 없다.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인하는 아기를 낳자마자 해외 입양 동의서에 지장을 찍는다. 친구가 건네준 아기의 탯줄은 화장실 변기에 버린다.

전수일 감독(51)의 신작 '영도다리'(영제는 'I Came from Busan')는 미혼모 인화(박하선 분)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점점 그리움과 죄책감에 몸부림치던 인화는 아기를 찾아 프랑스로 떠난다. 전 감독의 전작들처럼 이 영화도 고독한 영혼의 로드무비다. 제작비 1억 5000만원의 저예산 독립영화로 서울극장을 비롯해 CGV압구정 등 전국 10여 곳 상영관에서 1일부터 상영 중이다.

최근 서울아트시네마극장 건물 1층 레스토랑에서 만난 전수일 감독은 20년 전 프랑스 유학길에 겪은 아픈 기억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부산 경성대 연극영화학과를 나온 전 감독은 파리 영화학교와 파리 제7, 8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경성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프랑스 유학 가면서 입양 가는 30개월 된 쌍둥이를 에스코트했어요. 도착해서 양부모에게 인계해야 하는데 아이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제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어요. 그걸 잊고 살았는데 우연히 프랑스 입양인을 접하고 다시 생각났어요. 거꾸로 미혼모가 아이를 입양시키고 난 후 겪는 감정을 그려보자, 더 시사점이 크다고 판단했죠. 외국 입양인이 매년 2000명인데 90% 이상이 10대 미혼모의 아이예요. 입양기관 사이트를 둘러보면 15세 17세 소녀가 '아이에게 죽을죄를 지었다. 미안하다'는 글을 올려요. 정말 눈물이 납니다. 피붙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전해졌어요. 그들도 엄마인 거죠."

열아홉 살 인화(박하선)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다.
열아홉 살 인화(박하선)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다.

▶ 19세 소녀, 희망으로 가는 '영도다리'를 건너다

-'영도다리'라는 제목이 상징하는 바는 뭔가요?

"다리라는 건 '연결'입니다. 미혼모가 아이를 낳고 난 다음 몸이 기억한 아이, 수술의 흔적, 젖몸살 등 연결의 의미가 있죠. 또 하나는 영도다리가 개발 때문에 조만간 사라져 버려요. 아직도 70~80년대 건물, 폐선이 남아 있는데 사람들이 잘 알지만 관심을 두지 않는 곳, 버려진 공간이라 인물과 맞는다고 느꼈어요. 제가 15년 전에 '내 안에 부는 바람'을 영도다리에서 흑백으로 찍었는데 제게 소중한 공간이고. 다시 한번 재현을 하고 싶었는데 마침 미혼모 이야기랑 잘 맞아떨어졌죠."

-처음부터 끝까지 화면이 흔들립니다.

"제가 들고 찍기를 했어요. 배우의 정서적인 불안, 아이를 보내고 난 후에 느끼는 불안이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MBC 월화드라마 '동이'에서 '인현왕후' 역을 맡아 시청자들에게 친근한 배우 박하선 씨가 출연했는데요.

"캐스팅 오디션을 여러 차례 하다가 선택했는데 굉장히 맑고 내면에 아픔이 잘 표현될 수 있는 배우였습니다. 그런 가능성을 보고 캐스팅을 했죠. 미혼모 역할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연기인데 본인이 굉장히 많이 몰입했었어요."

-하선 씨는 연기가 너무 어려워 감독님을 많이 원망했다던데요.

"극중 인물의 정서를 계속 요구했고요. 아픔이 배어나올 수 있는 연기를 얘기했어요. 본인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걸 요구했기에 부담스러울 수도 있죠. 예를 들면 입양기관 직원에게 '내 아이를 돌려주세요' 할 때 억눌린 감정이 확 쏟아지는 연기를 해야 했어요. 자기 몸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간 거니까 당당하게 하라고 했죠."

폐어선이 을씨년스럽게 정박한 영도다리 주변 풍경.
폐어선이 을씨년스럽게 정박한 영도다리 주변 풍경.

▶ 우리가 감추고 싶었던, 그래서 더 알려야 했던 일상의 폭력

영화 속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하나같이 어둡고 폭력적이다. 원조교제를 하는 인화의 친구 상미(허린)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나가는 게 꿈이다. 동네 초등학생은 자신보다 더 어린아이들에게 돈을 빼앗는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수시로 두들겨 팬다. 영도다리 밑에서 담배 피우던 중학생들은 잔소리하던 실직자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여고생들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다 다른 여고생을 불러다 때린다. 그리고 다시 천진하게 논다. 바깥에서도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든 한쪽 벽면이 투명한 노래방이지만 누구 하나 폭력을 말리지도 신고하지도 않는다. 전 감독은 우리 주변에 일상화된 폭력을 무덤덤하고도 집요하게 담아냈다.

-미혼모 인화가 주가 되지만 거리의 청소년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 신을 곳곳에 배치하신 이유는?

"여주인공을 둘러싼 십대들의 문제를 다뤘죠. 우리 사회가 사실 폭력에 대해 상당히 무관심하거든요. 기성세대는 그걸 알면서도 방관자처럼 외면하고 제대로 쳐다보기도 싫어하죠. 그런 걸 영화 속에 배치하고 싶었어요. 폭력이 분명히 있는데 넘어가려고 하는 걸요. 입양도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안인데 이상하게 반향이 없죠. 영화에 메시지가 있다면 '무관심을 일깨우자'는 겁니다."

-카메라는 인물을 관찰하듯 지켜봅니다.

"제가 항상 고민하는 게 얼마나 극에 개입하느냐의 문제예요. 저는 방관자보다는 관찰자 입장이죠. 드라마를 배제하고 인물의 흐름을, 크고 강한 연기보다는 일상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청소년 영화'지만 미성년자 관람불가 판정을 받았습니다.

"굉장히 아이러니하죠. 폭력이 나왔다고 해서 피가 나온 것도 아니고. 십대들이 보고 생각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아쉽습니다. 언젠가는 십대들이 보겠죠. 학교에서 선생님이 보게 한다든가."

-대사와 설명이 없고 은유와 상징이 가득하다 보니 청소년들에게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히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게 더 우리 모습이야 생활이야'라고. 또한 인화가 아이를 쉽게 내줬다가 받은 상실감 충격을 보면서 십대들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십대들에게 성교육을 강조한다고 하지만 실제 아기를 가진 후에 벌어지는 일에 대해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저런 아픔과 상실감이 있다는 걸 안다면 다른 선택을 할 겁니다."

▶ "아기와 돌아가진 않지만 살아갈 '희망' 얻을 것"

-인화가 상미 남자친구에게 얻어맞아 쓰러진 후 바로 프랑스로 신이 점프했습니다.

"우리가 줄거리에 너무 집착해요. 공간과 이야기의 생략이 이 영화에서 노리고 싶은 바였습니다. 새로운 인물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환기를 시켜주고자 했어요. 영도다리라는 황폐한 공간에서 알프스 샤모니라는 부유한 아름다운 곳으로 변하는 게 좋았어요. 일부로 의도를 했습니다."

-희망적인 면에 중점을 두려고 새하얀 알프스 마을을 택했나요?

"인화가 아기의 목소리를 듣고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희망을 갖고 살지 않을까 하는 거죠. 현실에서 더 치열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더 눈이 확 차 있는 공간을 원했었어요. 순수한 느낌을 여주인공과 매치를 시키고 싶었고."

-마지막에 인화가 "I came"이라며 말을 잇지 못합니다. 영화의 영어 제목이 "I came from Busan"인 걸 보면 부산에서 왔다는 말이 빠진 것 같습니다.

"부산은 인화의 정체성이죠. 차마 어디서 왔다고 하지 말을 못 합니다."

-꾸준히 아픔과 상처의 치유를 하는 영화를 만듭니다. 개인사가 연관됐나요?

"누구나 상실감이 많잖아요? 없어질 공간이나 사람 사이의 단절이라든지…. 그래도 세상은 작은 희망으로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요. 그런 과정을 담고 싶었습니다."

아이를 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인화는 프랑스로 입양된 아이를 찾아나선다.
아이를 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인화는 프랑스로 입양된 아이를 찾아나선다.


▶ 외국에서 좋아하는 '예술 영화 감독' 전수일

원래 전 감독은 해외 영화제가 좋아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장편 데뷔작 '내 안에 우는 바람'(1997)을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에 진출시켜 국제적 주목을 받았고, 두 번째 작품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1999)도 2000년 프리부르국제영화제 대상을 받았으며 베니스영화제와 모스크바영화제 등에 소개돼 호평을 받았다. '검은 땅의 소녀와'(2007)는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 오리종티에 초청돼 국제예술관연맹상을 받는 등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17개 상을 수상했다. '영도다리' 역시 국내 공개 전 산세바스티안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라스팔마스 영화제 초청 등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았다.

-영화제가 좋아하는 감독이 된 비결이 뭔가요?

"자기 색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대사보다는 이미지로 말하는 걸 좋아한다는 평가를 많이 들었어요. 또 한 가지 저는 절제를 좋아합니다. 많은 걸 드러내기보다는 상상하게 만드는 거죠.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다 설명해 보라면 스페인 내전을 거론해야 하나, 이미지를 느끼라고 하면 더 와 닿게 됩니다. 대사와 인물도 주요하지만 저는 공간과 빛이 더 중요해요. 인물들도 공간의 한 요소입니다."

-예술영화만 고집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는 영화를 산업으로 보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봅니다. 영화를 상품처럼 만들어서 많은 사람이 보게 한다 는 건 슈퍼마켓에서 물건 파는 것과 같은 이치죠. 영화도 하나의 글 사진 회화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매개체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감독의 목소리와 사회를 바라보는 주관성을 담아야죠. 요즘 쓸데없이 대사가 많은 영화가 많아요.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아 관객을 수동적으로 만듭니다."

전 감독은 영화감독 지망생들에게 자기가 말하고 싶은 걸 구애받지 않고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즘 영화나 TV 드라마는 볼거리와 줄거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꽉 짜인 게 좋다는 거죠. 나는 많은 감독이 시처럼 이미지를 통해 어떤 깨달음을 주는 그런 영화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이런 얘기를 자주 하곤 합니다."

최현정 기자 phoe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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