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로봇 부자’ 차범근-차두리가 뜬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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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24일 15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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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심한 월드컵, 최대 이슈는 '로봇 차두리'
● 차두리는 한국인들의 '몸'에 대한 콤플렉스의 해방구
● 차 부자에 대한 관심은 한국인이 바라는 변화된 아버지상 반영

월드컵 재미있게 즐기고 계십니까? 한국이 그토록 기원하던 원정 16강이라는 숙원을 달성했군요. 짝짝짝! 열심히 뛰어준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사실 한국이 16강에 진출하지 못했다면 개인적으로는 이번 월드컵은 오랫동안 최악의 월드컵으로 기억하리라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예선전에서 보여준 강팀들의 플레이는 수준 미달이었습니다. 약팀들은 극도의 수비 전술을 택하여 이른바 '안티풋볼'이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몇몇 감탄을 자아내는 중거리 슛들도 있었지만 많은 슛이 모두 허공으로 치솟았고, '대륙을 가르며' 동료 선수의 발 앞으로 배달되어야 하는 스루패스는 번번이 너무 길어 골라인을 넘어가기 일쑤였습니다. 남미 특유의 현란한 개인기도 이번에는 엉망이었습니다. 발끝에 붙어다녀야 하는 공은 매번 선수와 너무 멀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게 다 '자불라니'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한 반발력과 정확한 공의 궤적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자불라니는 그 엄청난 탄성 때문에 너무 빠르고, 너무 멀리 가거나 아니면 너무 짧게 갈 수밖에 없는 괴물이었다는 것이 판명된 것 같습니다. '자불라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줄루족 언어로 '축하한다'라는 뜻이라던데, 뜻과는 반대로 이번 월드컵을 축하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자불라니! 돌려 내놓아라 나의 월드컵!!!

온라인에서 차두리가 연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차두리 로봇 설계도와 영화 ‘아바타’를 패러디한 ‘차바타’ 포스터(사진) 등은 차두리에 대한 누리꾼의 높은 관심을 반영한다. 사진출처 = ‘럭키2인자’ 트위터, 블로그
온라인에서 차두리가 연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차두리 로봇 설계도와 영화 ‘아바타’를 패러디한 ‘차바타’ 포스터(사진) 등은 차두리에 대한 누리꾼의 높은 관심을 반영한다. 사진출처 = ‘럭키2인자’ 트위터, 블로그

▶ 차두리는 차범근 박사가 만들어낸 로봇?

월드컵 열기도 예전만은 못하고, 경기들도 그다지 재미는 없지만 한국 누리꾼들의 상상력은 심심함을 참지 못하나 봅니다. 한국의 16강 진출을 제외한다면 이번 월드컵의 최대 이슈는 '차두리 로봇설'일 듯합니다.

차두리는 차범근 박사가 만들어낸 로봇으로 차두리의 유니폼 뒤에 새겨진 이니셜인 'DR CHA'는, 즉 '차 박사'는 그 증거라는 것입니다. 차범근 해설위원이 해설 중간 중간 무선 조종기를 통해 차두리를 조종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차두리가 공을 잡을 때면 차범근 해설위원은 얼어붙은 듯 말이 없어지고, 차두리는 로봇이기 때문에 힘들고 고된 훈련 중에도 늘 웃는 하나의 표정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번 월드컵 이전까지 대표팀에서 차두리의 백넘버는 아버지 차범근의 번호였던 11번인데 이것은 충전을 위한 콘센트 구멍을 위장하기 위한 번호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220V 충전을 위해 22번을 등번호로 달았다고 누리꾼들은 농담 삼아 우기고 있습니다.

12일 오후 남아공 포트엘리자베스 넬슨만델라베이 경기장에서 펼쳐진 한국 대 그리스와의 전반전 경기에서 차두리 선수가 공을 몰고 있다. 포트엘리자베스=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12일 오후 남아공 포트엘리자베스 넬슨만델라베이 경기장에서 펼쳐진 한국 대 그리스와의 전반전 경기에서 차두리 선수가 공을 몰고 있다. 포트엘리자베스=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 차두리에 부딪혔을 뿐인데…일본 선수 세 명 튕겨져 나가

이런 차두리 로봇설은 월드컵 이전에 있었던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수비수인 그가 페널티박스 부근까지 올라와 드리블을 시도하자 일본 선수들이 공을 뺏으려고 달려듭니다. 세 명의 일본 선수가 차례로 차두리에게 달려들었지만 차두리와 부딪히는 순간 모두 튕겨져 나갑니다.

차두리가 엄청난 개인기를 선보인 것도 아니고 그저 달리기만 했을 뿐인데 일본 선수들로서는 도저히 그를 막을 수 없는 장면을 연출한 것입니다. 차두리가 로봇이라는 의혹(?)이 제기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강철로 만든 듯한 단단한 몸. 폭주 기관차 같은 스피드와 저돌성. 이 모두는 100미터를 11초에 뛴다는 전설의 '갈색폭격기'인 아버지 차범근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지요. 아톰의 아버지 코주부 박사, 두리의 아버지 차 박사. 그래서 차범근은 로봇을 탄생시킨 아버지 차 박사가 됩니다.

차두리의 이 크고 탄탄한 몸과 스피드는 훨씬 이전부터 화제였습니다. 2002년 월드컵과 독일에서의 활약을 담은 동영상은 종종 누리꾼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곤 했었습니다.

물론 이 동영상들에서도 핵심은 뛰어난 개인기가 아니라 스피드와 몸싸움이었죠. 사실 2002년까지도 호리호리 했던 체격의 박지성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자마자 받은 특명이 몸을 키우라는 거였다고 하니 체격도 축구선수를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이긴 합니다. 유럽 선수들과의 어깨 싸움에서도 절대 밀리지 않는 한국선수. 차두리는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선수였던 거죠.

물론 이 기다림 속에는 서양인보다 키나 몸집에서 상대적으로 왜소한, 그러므로 인해 심리적 축소감까지 가졌던 한국인들의 '몸'에 대한 콤플렉스의 해방구라는 의미까지 담고 있습니다.

차범근 해설자와 차두리 선수. 동아일보 자료사진
차범근 해설자와 차두리 선수. 동아일보 자료사진

▶ 아버지에게 혼날 때는 '움찔'하지만…신나는 축구광

하지만 차두리의 신체적 우월성만으로 지금 벌어진 '차두리 로봇설'의 폭발성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차두리 로봇설'의 더 중요한 지점은 바로 아버지 차범근에게서 시작됩니다.

23일 나이지리아와의 16강 진출을 결정하는 일전을 벌이고 있던 한국 대표팀은 선제골을 허용합니다. 우측에서 날카롭게 올라온 센터링이 나이지리아 선수 우체의 발에 맞고 들어간 것이죠. 우체 바로 앞에는 차두리가 있었습니다.

해설자 차범근이 외칩니다. "아…. 차두리….사람을 놓쳤어요." 해설자로서 시청자들에게 경기 상황과 분석을 정확히 전달해야하는 자신의 임무를 다 합니다. 물론 그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절절히 묻어나지만 아들 차두리의 이름과 그의 실수를 정확히 지적한 것입니다.

2006년 MBC 독일 월드컵 경기 축구해설로 인기를 끌고 있는 차범근-차두리 부자.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6년 MBC 독일 월드컵 경기 축구해설로 인기를 끌고 있는 차범근-차두리 부자. 동아일보 자료사진

사실 차범근은 엄한 아버지입니다. 차두리가 대표팀에서 탈락하고 아버지 차범근과 함께 2006년 독일 월드컵에 해설자로 등장했을 때의 한 장면은 4컷짜리 사진으로 편집되어 인터넷을 떠돌고 있습니다.

중계 도중 상대편의 골 상황에서 오프사이드 판정을 내리지않는 심판에 대해 흥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이렇게 외칩니다. "이건 사기입니다." 이 말을 들은 차범근은 중계 중이라 말은 못했지만 대신 아들을 무섭게 노려봅니다. 해설자로서 또 현역 선수로서 경기 상황이나 다른 선수의 플레이를 너무 쉽게 판단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가 담긴 눈빛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엄한 질책에 차두리는 그 후 제대로 말도 몇 마디 못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이런 엄한 아버지의 모습은 계속됩니다. 첫 경기였던 그리스전에서 차두리가 공을 잡으면 캐스터가 차두리에 대해 한마디 하라는 듯 차범근 해설위원을 부추깁니다. 이 정도 부추기면 몇 마디 할만도 하건만 차범근은 차두리에 대해서는 평가나 사적인 이야기는 극도로 자제하면서 경기 상황만을 이야기합니다. 밖에 나가서 부인이나 자식자랑을 하면 팔불출이라는 오래된 격언을 금과옥조로 삼는 낡은 아버지이지요.

▶ 가부장적이고 엄하지만 합리적인 아버지 차범근

하지만 주목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차범근의 엄함은 해설자, 감독,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로서의 객관성에 기반한 엄함이라는 점입니다. 감정적, 정서적 엄함이 아닌 합리적이고 경험에서 우러난, 그리고 아들마저 객관화시킬 수 있는 엄함이란 말이지요.

"이놈의 자식이…" 로 시작하는 일반적인 아버지들의 질책과는 다른 객관화된 질책에 사람들은 열광하는지도 모릅니다. 차범근의 객관성을 믿기에 사람들은 이들 부자를 캐릭터화하고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의 우호적 평가는 엄함 뒤에 아들 차두리에 대한 무한애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점과 차범근은 그 애정을 종종 표시할 수 있는 행운도 갖고 있다는 점도 작용할 것입니다.

2002년 한국이 사상 최초로 4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는 과정에서 차범근은 해설도중 "자랑스럽습니다. 한국 선수들. 저 안에 우리 아들도 뛰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전 국민 앞에서 자식자랑을 한 팔불출은 역사상 처음일 것입니다.

차범근 해설자 가족. 1983년 차범근선수와 부인 오은미씨가 자녀(하나, 두리씨)와 함께 김포공항 대합실에서 걸어나오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차범근 해설자 가족. 1983년 차범근선수와 부인 오은미씨가 자녀(하나, 두리씨)와 함께 김포공항 대합실에서 걸어나오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차범근의 모습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아버지들의 모습과 닮았지만 확연히 다른 면모를 보입니다. 그것이 지금 나타나고 있는 차두리 로봇설에 대한 본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은날을 국가의 경제성장과 가족의 생활을 위해 바친 한국의 아버지들. 그러므로 가족에게는 돈벌어오는 사람으로 인식되었고, 가족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경제적 능력이 상실된 지금에는 예전에 행사했던 권위적 방법만으로 가족 속에 자리잡으려는 아버지들.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런 아버지가 아닌 객관적 아버지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객관적 질책이라면 그 질책이 아무리 엄중하더라도 차두리처럼 받아들일 용의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아버지들의 저 깊은 마음속 밑바닥에 숨겨진 무한애정을 발견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가 이루어진다면 아들 세대들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대한민국이 차범근 차두리 부자를 응원하는 이유

로봇으로 희화화되긴 했지만 차두리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벗어던진 새로운 인간형을 상징합니다. 차두리의 인기는 그가 축구 국가대표이고 차범근의 아들이고 또 건장한 신체를 가진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어찌보면 젊은 세대의 워너비(wannabe)입니다. 차범근이 독일에서 활동하며 세계적인 축구 스타로 명성을 날리던 때 태어난 차두리는 유년기를 독일에서 보내게 됩니다.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차두리는 기존 한국 축구선수들이 보여준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울분과 한 그리고 눈물 등으로 표현되는 운동선수가 아닌 선수 '생활'을 즐기는 모습. 생활인 혹은 직업인으로서의 운동선수인거죠. 그러므로 명쾌합니다. 경기 도중 그렇게 환한 미소로 뛰어다니는 한국의 축구 선수를 별로 본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축구를 통해 다른 무엇을 성취하려는 일반적인 선수들의 모습과는 달리 차두리는 축구 그 자체를 즐깁니다. 김연아가 스케이팅을 즐기고, 김태환이 수영을 즐기는 것처럼 그는 그저 경기를 즐기는 것입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16강에 오르자마자 박지성이 주장으로서 팀 동료들에게 "자! 이제 최대한 즐기자"라는 말도 일맥상통한다고 보입니다. 원정 16강이라는 목표를 위해 경기를 하나의 수단으로 삼았던 예선전의 기억은 버리고 축구 그 자체를 즐기자는 것이죠.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지옥 같은 입시경쟁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 가족과 미래를 위해 힘들고 때로는 자존심 상하는 회사생활을 견뎌내는 것. 이런 태도와 삶이 그 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해왔던 미덕이었고, 그것은 젊은 세대들에게도 훈계조로 강요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곳곳에서 이러한 미덕을 거부하는 변종들이 생겨나고 그 변종들에게 젊은 세대는 애정을 보냅니다.

2002년 태극기를 머리에 둘러쓰고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던 차두리의 모습. 진정으로 자신의 축구 인생을 즐기며 삶을 살아가는 차두리의 모습.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6살짜리에게 축구공을 주었더니 아빠의 다리를 걷어차 놓고서는 "월드컵에 나간 선수들은 다 이래"라고 말하는 유쾌한 발칙함을 가진 차두리의 애피소드. 이런 모습들을 보고 싶고 또 하고 싶은 것이 젊은 세대들이 간절히 바라는 자신들의 삶일 것입니다. 아버지로 부터 신체를 물려받고 아버지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지만, 그것을 부정하거나 그것과 대립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즐길 줄 아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 그래서 대중들은 차두리를 로봇으로 만들고 즐거워하는게 아닐까요?

대중들이 쏟는 차두리, 차범근 부자에 대한 독특한 애정표현은 월드컵에서의 한국 대표팀의 선전을 응원하는 동시에 어쩌면 한국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기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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