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82>

  • 입력 2009년 9월 16일 15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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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결혼식장은 조촐했다.

서사라의 사진을 꺽다리 세렝게티가 들고 최볼테르의 사진을 뚱보 보르헤스가 안았다. 두 사람 사이에 보안청에서 돌아온 글라슈트를 세웠다. 내부 부품이 모두 제거된 로봇 인형 신세였지만, '배틀원 2049' 우승자다운 기운이 뿜어 나왔다.

5시까지는 아직 15분 정도 남았다. 노민선까지 포함해서 차세대로봇연구소 전임연구원 세 사람은 내일부터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 했다. 차세대로봇연구소 자체가 해체되는 것이다.

"최교수가 사람의 뇌를 글라슈트에 옮겨 넣은 것을 알면 저승에서라도 서트레이너가 이 결혼을 받아들일까?"

석범이 의자에 앉아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직 석범은 세렝게티와 보르헤스에게 글라슈트의 머리에서 사람의 뇌가 발견된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민선 역시 두 연구원을 의식한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공범 없이 이 일이 가능하다고 보세요?"

석범이 움찔 어깨를 떨더니, 고개를 들어 볼테르와 사라의 영정사진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남형사가 어떻게 관악산 비밀연구소까지 갔을까요? 서트레이너가 미행을 알아차리고 유인했다고 생각지는 않으세요? 불이 난 건 단순 사고일까요? 남형사가 불길을 벗어나지 못한 건 무엇 때문일까요? 또 원숭이 반인반수족은 거기 왜 있었던 걸까요? 그들이 모두 죽어버려서 자세한 사정을 밝히는 건 어려워졌지만, 이상하지 않나요? 연쇄살인사건 추정시각과 최교수의 알리바이를 하나하나 조사해보세요. 아마도 최교수의 알리바인 완벽할 겁니다. 이건 무얼 의미할까요?"

"서트레이너가 반인반수족을 이끌고 범행에 나섰다는 말이야? 그녀가 왜?"

민선이 허리를 펴고 이야기 속도를 늦췄다.

"그야…… 욕심 때문 아니겠어요?"

"욕심?"

"글라슈트를 우승시키겠다는 욕심! 그러니 참으로 어울리는 한 쌍 아닐까요? 저들은 내내 같은 길만 바라본 겁니다. 아, 이제 정각 5시에서요. 식을 시작하죠."

민선이 일어서서 단상 앞으로 걸어 나갔다. 주례처럼 글라슈트를 가운데 세우고 세렝게티와 보르헤스가 마주 보며 섰다.

영정 속 두 사람은 웃지 않았다.

볼테르는 미간을 한껏 좁힌 채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정면을 노려보았고, 사라는 굳은 얼굴로 시선을 반쯤 내렸다. 산발한 사자머리가 배경을 거의 가린 것을 보니, <바디 바자르>에서 공연을 마친 뒤 몰래 찍은 사진인 듯했다. 석범은 두 사진을 번갈아 보면서, 두 사람의 웃음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의 기억엔 그들의 웃음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었다. 기쁨과 즐거움을 반납한 채 오로지 글라슈트만을 위해 살아온 나날이었다.

민선이 손뼉을 두 번 치자, 세렝게티가 글라슈트의 오른손을, 보르헤스가 왼손을 각각 뻗어 잡았다. 그렇게라도 글라슈트에 지극했던 볼테르와 사라의 마음을 이어주려는 것이다.

"잠깐만!"

석범이 예식을 끊었다. 세렝게티와 보르헤스 그리고 민선의 시선이 석범에게 몰렸다. 석범이 나아가서 민선 곁에 섰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꼭 참석해야할 분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민선이 눈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예요, 빠진 사람 없는데?"

그때 훈련장 문이 열렸다. 검은 천을 머리에 쓴 여인이 천천히 단상을 향해 걸어 나왔다.

"누, 누구……?"

민선이 말을 더듬었다. 불청객은 민선 앞에 멈춰 선 후 인사를 건넸다.

"내가 너무 늦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민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였다.

"어서 와. 이제 막 시작하려던 참이야."

석범이 반겨 맞았다. 민선이 고개를 돌려 석범과 눈을 맞췄다.

석범이 반말을 쓰는 여자는……? 날 제외하곤 단 한 사람뿐인데, 설마?

민선이 천천히 불청객의 검은 천을 양손으로 들고 머리 뒤로 넘겼다. 얼굴보다 먼저 붉은 단발머리가 찰랑거렸다.

"나, 남형사! 당신은 죽었는데……. 석범 씨! 이게 도대체……."

석범이 낡은 흑백사진 한 장을 꺼내 민선에게 디밀었다. 거기, 세 여자 중 한 사람이 지금 민선의 모습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박열매, 그녀가 바로 노민선의 어머니였다.

앨리스가 민선의 팔뚝을 잡아 뒤로 꺾는 것과 동시에 석범이 외쳤다.

"노민선! 당신을 연쇄살인 및 살인 교사 혐의로 체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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