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79>

  • 입력 2009년 9월 13일 13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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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장 불청객]

완전한 휴식이 어려운 시절 : 디지털은 삶의 도구가 아니라 삶 자체가 되었다. 단절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로그인을 강요한다.

달섬 관리소는 섬을 더 이상 개방하지 않고 시설 정비 및 환경 정화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비수기인 겨울에는 가끔 있는 일이지만 성수기인 여름에 섬을 닫는 것은 이례적이다.

오전 9시를 갓 넘었는데도 뜨거운 태양이 섬 전체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바다에서 혼자 수영을 즐기던 민선이 해변으로 나왔다. 검은 비키니 차림이었다. 잘록한 허리와 긴 다리가 매력적이었다. 냉수로 목을 축인 다음 파라솔 아래 벤치에 엎드렸다. 마른 수건과 함께 책 두 권이 놓여 있었다. 손미주의 <나는 로봇에 반대한다>와 <도시의 종말>이었다. 그 중 <도시의 종말>을 펼쳐 들고 세 페이지 쯤 읽어나가다가 그대로 책에 뺨을 묻고 잠이 들었다. 바닷바람이 불어 올라와서 파라솔을 흔들자, 그녀를 덮은 그림자들도 따라서 춤을 췄다.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천천히 척추를 따라 내려가다가 수영복 끈을 풀었다. 그녀는 놀라지도 않았고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그 손이 허리를 타고 더 아래로 내려가서 엉덩이에 닿았다. 수영복 안으로 손가락이 들어왔을 때, 그녀가 허리를 비틀어 상체를 일으키면서 '누군가'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석범은 반팔 티셔츠와 감색 면바지에 낡은 구두를 신었다. 수영을 즐기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다. 민선의 벌거벗은 젖가슴이 석범의 티셔츠를 눌러왔다. 석범은 그녀의 혀를 받아들이면서 티셔츠를 벗어 모래사장에 던졌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목덜미를 가슴을 배꼽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곧 알몸으로 뱀처럼 엉켰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민선이 원망하는 말들을 뱉어댔다.

"…… 어제 올까 싶어 ……아, 한숨도 못 잤어요 ……스마트폰은 왜 연결이 안 되는 거죠? …… 오늘까지 안 오면 ……."

"안 오면?"

"보안청으로…… 달려가려고 했죠."

"은석범 나와라! 외치기라도 하려고?"

"외쳐서…… 나오기만 한다면……."

"사랑해!"

석범이 다시 그녀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갈매기들은 끼룩끼룩 가까이 혹은 멀리서 울었고, 파도는 철썩 처얼썩 흰 물보라를 뿌리며 튀어 올랐으며, 바람은 파라솔을 빙글 돌아 사랑에 열중하는 남녀의 등에 잠시 올라탔다가 언덕으로 물러났다. 달섬만 빼곤 세상이 멸망하여 지구에 단 두 사람만 남은 것처럼, 석범과 민선은 서로에게 열중했다. 여기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여기서부터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려는 몸부림 같기도 했다.

"오후 5시에 시작해요. 같이 갈 거죠?"

사랑을 끝낸 후 민선이 큰 수건을 벤치 위에 고쳐 깔며 물었다.

"갈 필요가 있을까? 난 글라슈트 팀원도 아닌데."

"팀원이나 마찬가지죠. 끝까지 우릴 위해 많은 일을 도와줬으니까요. 그리고 서 트레이너를 특별히 좋아했잖아요?"

질문에 칼날이 숨어 있다.

"내가? 전혀……. 살인 사건 수사를 위해 만났던 게지."

석범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이마에 주름부터 잡았다.

"모를 줄 알았어요? 부엉이 빌딩이 폭파되던 날, <바디 바자르>에서 서 트레이너를 쳐다보는 당신의 눈동자를 잊을 수 없답니다. 사랑에 젖은 눈동자였거든요. 서 트레이너도 싫지 않은 표정이었고."

민선이 계속 넘겨 집었다.

"생사람 잡지 마."

석범이 눈을 흘겼다. 민선이 양팔을 뒷목에 붙인 채 나비처럼 팔꿈치를 팔랑댔다.

"농담이에요. 서 트레이너가 오랫동안 최 교수님을 흠모하더니 결국 식을 치르는군요. 비록 영혼결혼식이지만……."

서사라의 사망 소식이 나간 후 영혼결혼식을 제안한 사람이 바로 노민선이었다.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글라슈트 팀원들만 하객으로 참석하는 조촐한 결혼식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서사라는 연고자가 없었고 최 볼테르는 파리에 거주하는 부모의 형식적인 동의를 받았다. 볼테르를 유력한 용의자로 두고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기 전에 결혼식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죽고 나면 다 끝인데, 괜한 짓이지."

석범이 슬쩍 튕겼다. 그는 처음부터 영혼결혼식에 반대했다.

"괜한 짓만은 아니죠."

민선이 팔랑대던 팔꿈치를 멈추고 받아쳤다. 석범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뇌신경과학자인 노민선 박사님은 그럼 사후세계를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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