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근혜님의 ‘神託통치’

  • 입력 2009년 8월 2일 20시 14분


지난 금요일 친박연대에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전지명 친박연대 대변인이 아침 라디오방송에 나와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이하 박근혜)를 비판하는 듯한 말을 한 뒤 반나절도 안 돼 사실상 경질된 것이다. 원칙을 강조하던 박근혜가 좀 달라진 것 같다는 진행자의 말에 “원칙에 반하는 판단을 하실 분이 아닌데…누군가 옆에서 판단을 흐리게 한 사람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발언했다는 이유다.

“찍히면 죽는다” 박근혜 패닉 팽배

미디어법과 관련한 박근혜의 태도에 대해선 보는 이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보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박근혜에 대해 말 한번 삐끗했다고 공당(公黨) 대변인의 목이 날아간 그 열혈충정의 집단심리였다. 알라신에 불경하면 단칼에 베어버리는 종교적 근본주의가 떠오를 정도다. 친박연대 게시판엔 ‘친박은…모든 국민이 편안하게 잘살 수 있게 하는 종교다’라는 글도 있다.

반박(反朴)도 박근혜에게 목이 걸려 있긴 마찬가지다. 고비마다 그의 한마디는 정국의 물줄기를 돌렸고 그가 손을 안 들어주면 선거에 졌다. 이젠 어떤 법안이나 인사(人事)도 박근혜의 재가 없이는 어려울 판이다. 계파 수장 정도가 아니라 대통령을 능가하는 반인반신(半人半神)의 경지다. 당연히 그는 말이 길지 않고, 옥음을 들려주지 않을 때가 많다. 측근이 대신 설명하거나 발언을 전하기 일쑤다. 해석이 잘못됐다며 다른 측근이 나서기도 한다. 신이 특정인을 매개자로 해서 뜻을 펴는 신탁(神託)통치가 이런 건가 싶다.

‘신념 있는 원칙주의자’ 박근혜의 원칙이 신의 뜻처럼 절대 진리인지, 아니면 금배지에 목을 매단 정치꾼과 구세주를 고대하는 일부 국민이 만든 신화인지는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7년 대선 뒤 “박근혜를 국정파트너로 모시겠다”던 약속을 안 지킨 것, 박근혜가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했던 2008년 총선 공천은 그로선 용서하기 힘들겠으나, 과거에 매달리면 앞으로 갈 수 없다. 핍박받는 왕녀의 이미지로 친박 사람들을 대거 당선시켰고 자신은 부동의 대통령감 자리를 굳히고 있으니 밑진 것만은 아니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저주라도 받은 듯 한나라당은 올봄 재선거까지 참패했다.

지리멸렬한 한나라당에, 답답한 청와대를 보다 못한 여론이 대통령에게 박근혜를 끌어안으라고 요구한 게 벌써 한참이다. 여권 주류가 뒤늦게 옹색하게나마 꺼낸 화합책이 친박계 좌장이라는 김무성의 원내대표 카드다. 그런데 박근혜는 냉정하게 잘랐다. “당헌 당규를 어기면서 그런 식으로 원내대표를 하는 것은 반대”라고.

원칙만 고집하는 독선이 무섭다

당헌 당규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신의 뜻을 어기면 지옥 간다는 중세가 아니다. 현대사회에선 민의와 세상변화에 따라 헌법도 바꿀 수 있다. 그때 박근혜가 늘 강조해온 ‘국민의 뜻대로’ 화합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그 이후라도 신탁 말고 동참을 해줬다면, 그리하여 한나라당이 집권당답게 탈바꿈했더라면 나라꼴은 오늘처럼 꽉 막히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박근혜의 원칙이 국익보다 중요한지 의문이 치미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 영국 여왕을 가장 존경한다고 했다. 누명을 쓰고 런던탑에 갇혔던 비운의 공주, “나는 조국과 결혼했다”던 처녀여왕의 숙명만을 자신과 동일시하진 않았을 것이다. 1559년 즉위 때만 해도 종교 갈등과 외세간섭에 시달렸던 섬나라를 여왕은 1604년 세상을 뜰 때까지 기적처럼 발전시켜 대영제국의 기틀을 세웠다. 그런 리더십을 본받겠다고 박근혜는 수없이 다짐했을 것 같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가 실용과 타협, 적응에 뛰어난 유연한 리더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여왕은 신교도였지만 국교회를 부활시키고, 선왕 메리의 장례식을 가톨릭 의식대로 할 수 있도록 허용해 나라 분열을 막았다. 학식 깊고 유능했지만 신하들에게 “내 의지를 존중하지만 말고 당신들이 생각하는 최선을 충언하라”고 했다. 현재의 대통령을 능가하는 군주였음에도 원칙만 고집하는 먹통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미니홈피에 휴가인사를 올린 근혜님은 지금 신전에서 행복한지 몰라도 우리는 안녕하지 못하다. 우리에게 몇 안 되는 정치적 자산이자 희망인 그가 만에 하나, 이 정부가 망해야 차기 대권을 잡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국민과 역사에 죄짓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수구좌파에 정권이 넘어가 애써 공부한 대권수업을 써먹을 기회가 사라질 수도 있다. 국민이 완전히 등 돌리기 전에, 말 한마디에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하는 독보적 정치력으로 한나라당이든 친박연대든 당대표로 나서 국정의 한 축을 책임지기 바란다. 평양까지 찾아가 어머니를 죽게 한 김정일과도 악수했는데 나라를 위해, 또 자신을 위해 못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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