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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5월 22일 19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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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써도 약속한 기부금은 내라?
하급심 판결이긴 하지만 겨우 움트기 시작한 대학 기부문화의 싹을 잘라 버렸다는 점에서 걱정스럽다. 우리나라는 대학에 대한 개인기부 문화가 척박하다. ‘김밥할머니’ 기부가 근근이 명맥을 이어오다가 최근에야 거액을 쾌척하는 자산가가 등장했다. 지난해엔 한의사인 류근철 박사가 개인기부 사상 최고액인 578억 원을 KAIST에 기부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대학 기부문화가 이렇게 척박한 터에 법원이 ‘기부 약속은 채무’라고 결정하면 과연 어떤 사람이 채무자가 되는 부담을 무릅쓰고 대학에 기부하려 할 것인가.
기부를 어렵게 하는 사회 분위기는 이뿐이 아니다. 등록금이 1000만 원에 육박하면서 대학들이 보유한 적립금이 표적이 되고 있다. 대학 측이 엄청난 적립금을 쌓아놓고 학생들로부터 등록금을 더 걷는 것은 잘못이라는 비난이 거세다. 적립금 운용 현황을 공개하라는 압력에 대해 고려대와 연세대는 “적립금은 경영·영업상 비밀”이라며 정보 공개를 거부했다. 급기야 3월 연세대 학생이 참여연대와 함께 학교를 상대로 적립금 운용 현황을 공개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적립금 현황을 굳이 감출 필요가 있을까 하고 나도 의아해하던 차에 김한중 연세대 총장의 관훈포럼 발언에서 해답을 찾았다. “적립금은 등록금으로 조성된 돈이 아니라 장학기금, 건축기금 등 특정 목적의 기부금입니다. 기부자들이 기부 사실을 감추려고 하는데 우리가 이것을 공개할 경우 기부자들이 곤란을 겪게 됩니다.”
우리나라 기부자들은 기부를 하면 사회적 존경을 받기는커녕 “혼자만 잘 났냐” “3불(不)정책이 폐지되면 자식에게 기여입학 혜택을 주려 하느냐” 혹은 “우리도 도와 달라” 같은 질시와 압력에 시달리게 된다. 우리나라는 9 대 1의 비율로 기업기부가 개인기부를 압도한다. 적립금 명세를 공개할 경우 기업들이 주주나 시민단체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선진국 대학들은 기부금 명세를 공개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어쩌면 우리나라 대학들이 적립금을 공개하는 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잡아먹는 행위일 수도 있다.
기부문화, 세계최고 대학 만든다
막상 기부를 하려 해도 절차상 까다로운 점이 한둘이 아니다. 2002년 모교인 아주대에 210억 원을 기부한 황필상 씨는 지난해 증여세 140억 원을 얻어맞는 곤욕을 치렀다. 보유 주식을 100% 기부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주식으로 기부할 경우 전액을 기부해야만 면세된다는 법 조항을 몰랐던 것이다. 세무서가 증여세 추징을 취소하는 것으로 사건이 매듭지어졌지만 황 씨에겐 악몽이었다.
미국 명문대학을 키운 것은 등록금이 아니라 기부금이다. 미국에선 기부자가 대학을 세우면 아예 기부자의 이름을 따 대학이름을 짓는다. 밴더빌트대, 피바디대, 카네기멜런대가 그런 예들이다. 미국 대학의 랭킹은 기부금 랭킹과 거의 같다. 우수한 논문도, 훌륭한 인재도 돈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 대학들이 세계 100대, 200대 대학에 다수 진입하려면 지금과 같은 대학 기부 문화로는 어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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