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제동]인생도 야구처럼, 9회말 투아웃부터

  • 입력 2009년 4월 17일 02시 56분


야구 때문에 즐거웠던 한 달이 지나고 야구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는 계절이 왔습니다. 올림픽 야구에 울었고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희망을 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를 보며 인생을 이야기하는데 야구야말로 인생과 많이 닮았다고 느낍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세 번의 기회가 있다는 겁니다. 크게는 3연전을 하고, 3회씩 세 번 9회를 치르며, 3명이 아웃되면 1회가 끝나고, 타자에게는 세 번의 기회를 줍니다. 상대적 약자인 투수에게는 볼 3개까지 유인할 수 있는 기회도 주지요. 볼넷으로 타자를 내보내도 홈으로 돌아와 득점을 하기까지 세 개의 누(壘)에서 아웃시킬 기회는 남습니다.

매번 세 번씩 주는 기회가 있어서 야구는 어떤 경기보다 변수가 많습니다. 묘하게도 위기 뒤에는 찬스가 항상 준비돼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지요. 올림픽 경기 8회의 역전 홈런과 WBC 결승 9회의 동점타를 기억하십니까? 유명한 로런스 피터 베라의 말이 떠오릅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지금 몹시 힘들 때, 앞으로 내게 무엇이 남아있기는 한가 싶을 때, 문득 앞이 보이지 않을 때 힘이 되어주는 말입니다.

세 번의 기회와 위기 뒤 찬스

야구가 인생을 닮은 또 한 가지는 득점 방법이 다양하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공하고 돈을 벌고 행복해지는 방법이 하나가 아니듯 점수를 내는 방법 또한 그렇지요. 인생의 한방처럼 홈런 한방이 있다면 다른 이의 도움 없이 득점이 가능합니다. 앞선 누군가가 누를 밟았다면 그들에게까지 득점의 기쁨을 나눠줄 수 있지요. 뒷사람의 도움으로도 점수를 냅니다. 내 힘은 1루까지였지만 누군가가 열심히 공을 쳐준다면 나는 또 달릴 수 있고 활짝 웃으며 홈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야구는 인간이 직접 들어가야 득점이 되는 거의 유일한 구기종목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득점 순간의 모습도 다양합니다. 홈런을 치고 여유만만하게 들어오는가 하면 아슬아슬하게 온몸을 날려 흙먼지를 뒤집어쓰기도 하지요. 홈으로 들어왔을 때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쁨을 나누는 모습만큼은 비슷합니다.

야구가 인생과 가장 닮았다고 느끼는 순간은 그럴 때입니다. 내 뒤에 가족이 있다고 느끼는 순간 말이지요. 이용규 선수의 인터뷰에서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희생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스포츠는 흔하지 않다, 서로 희생하고 힘을 합쳤을 때만이 팀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다고.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보내기 번트나 희생 플라이는 그야말로 희생이지요. 내가 방망이를 이렇게 갖다 대는 순간 나는 홈을 밟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기꺼이 할 수 있다, 그것이 억울하거나 속상하지 않다, 가끔은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줄 수 있음을 알기에, 이 모든 것이 우리 팀과 내 가족을 위해서이기에 감히 ‘희생’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지도 않은.

야구는 서 있을 곳이 정해져 있지요. 홈에서 먼 곳에 서 있어도 경기 내내 공 한번 잡기 힘든 위치에 서 있어도 주어진 자리이면 지켜야 합니다. 다른 곳을 기웃거리거나 정신을 파는 순간 우리 팀은 나로 인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때론 내 자리가 버겁고 때론 사소해 보여도 내 자리에서 할 일을 하면 됩니다. 포장마차에서 다가와 세상의 불공평함을 하소연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죽자고 열심히 해도 1루까지 가기 힘든데 어떤 인간은 3루에서 태어난 것 같다는 넋두리를 하는 거죠.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라 난감하고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알지 못해서 말입니다.

그분들이 이 글을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야구 경기는 지켜봤을 겁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해드릴 수 있습니다. 아직 9회 말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언제든 아웃일 수 있지만 3개의 누를 착실히 밟으면 언젠가는 웃으며 홈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지요. 둘러보면 무거운 짐을 지고 내 투정을 말없이 받아주는 포수가 있을 겁니다. 내가 제대로 던지지 못할 공을 막아내기 위해 1루수가 자리를 지키고, 내가 실수하면 달려오는 2루수가 있고, 우리를 위해 몸으로 공을 막을 3루수와 제 몸을 아끼지 않고 몸을 날릴 유격수, 내 힘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묵묵히 힘이 될 외야수가 있을 겁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 아니다

뭉쳐서 이기고 뭉쳐야 이길 수 있는 야구가 멋지듯이 가족을 믿고 살아간다면 인생도 멋질 겁니다. 끝까지 가봐야 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야구처럼, 형편없이 지는 9회말 투아웃의 지금도 인생의 끝은 아닙니다. 야구에서처럼 위기 후에 반드시 찾아오는 찬스를 믿으며 끝까지 공을 놓지 않는다면 기회는 찾아올 겁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인생은 언제나 제게 치기 힘든 변화구를 던지지만 그래도 작은 눈을 부릅뜨고 공을 노려볼 겁니다. 제대로 공이 온다면 언제든 1루로 달릴 준비를 하고 말입니다.

김제동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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