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서하진]진실게임

  • 입력 2009년 3월 31일 02시 53분


대한민국 부모들의 제1의 지상과제는 아이를 대학에, 사회생활에서 빠지지 않는 대학에 보내는 일일 것이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갖은 노력 끝에 둘째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 아, 이제 좀 호젓한 날이 오겠구나, 꿈에 부풀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웬걸, 입학 첫 달부터 집안은 하루도 조용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 문제는 아이의 귀가시간이었다. 과제를 하네, 동아리 모임이 있네, 아르바이트가 잡혔네…. 때마다 적절한 이유가 있었건만 남편은 도무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부부싸움 된 딸의 귀가시간

“험한 세상에, 다 큰 여자애가”로 시작되는 남편의 훈계를 다소곳이 듣는 것으로 끝난 적도 없지 않았으나 “하지만 아빠” 하며 아이가 반발을 시작하면 둘은 거의 온밤을 지새우며, 온 식구의 잠을 깨우며, 혹여 이웃에 새어나갈세라 열린 창을 단속해야 할 만큼 격렬하게 부딪쳤다. 남편의 편을 들어 아이를 나무라다가 좀 살살하시라, 남편을 말리다가 당신이 일한답시고 늦게 다니니까 아이도 시간개념이 없지 않느냐, 한마디 듣기라도 할라치면 그래서 뭘? 내가 뭐 해야 할 도리 안한 거 있냐, 사납게 대꾸가 나가고, 그 즉시 언쟁은 부부싸움으로 번지기 마련이어서 꾸중 듣던 아이가 “아니, 두 분 잠깐만” 하며 중재자 역할을 하는 소모적인 전쟁이 시작되는 거였다.

그런 상황이 단 한순간에 종결되었으니 출발은 진실게임이었다. 어느 저녁 집 앞 찻집에 둘러앉았을 때였다. 빈 음료수병을 장난삼아 돌리던 딸아이가 “우리 진실게임 해봐요”라고 했다. 뜬금없이 무슨? 싶었던 것은 나뿐, 두 딸아이와 남편은 눈을 반짝이며 병을 돌리고 그 입구가 향한 쪽 사람에게 진지하게 질문을 하고 심각하게 답하는 게임을 즐기는 눈치였다. “살면서 가장 후회스러웠던 적은?” “스스로가 창피한 적은 없었는가?”처럼 제법 생각을 요구하는 질문이 있었고 “내가 가장 자랑스러웠던 때는?” “내가 엄마를 제일 슬프게 한 일은?”처럼 기억과 애정을 시험하는 문제가 있었으며 엄마를 만나기 전에 애인이 있었나, 혹 결혼하고 싶었던 여자가 있었나 하는 제 아빠를 당황하게 만드는 질문이 있었다.

아이 속내 알고 화해의 포옹

몇 차례 순번이 돌다 빙그르르 돌던 병 입구가 딸아이 쪽을 향했을 때 남편이 물었다. 살면서 네 의견을 굽힌 적이 있었느냐. 설혹 네가 그르지 않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서 너의 견해를 접은 일이 있느냐…. 심호흡을 한 딸애가 아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짜 솔직히 저는 지금까지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제가 옳다 싶으면 끝까지 제 의견을 주장하는 편인데요…. 그 대목에서 잠깐 숨을 고른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아빠한테만은, 아빠 생각이 틀렸다 싶어도 아빠이기 때문에, 아빠가 너무 화를 내시니까, 늦을 때는 삼십분 간격으로 문자를 보내라, 이런 말씀, 터무니없다 싶어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문자를 보내면서 거의 부당한 권력에 굴복하는 심정이어도 아빠이니까, 그러니까…아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앉아 있었고 남편은 살짝 감동한 얼굴이었다.

이윽고 남편이 말했다. 그래, 이제 됐다. 나는 네 성격이, 도무지 굽힐 줄 모르는 그 고집이 싫었다. 아빠를 무시하는 게 아닌가 싶고 부모를 무시하는 애가 누구를 존중하겠나 싶어 심하게 굴었던 거다. 이제부터는 네가 알아서, 네 생활은 네가 책임져라. 몇 시에 돌아오든 나는 문제 삼지 않겠다…. 딸아이가 환호성을 지르며 아빠를 껴안음으로써 그날의 진실게임은 훌륭하게 끝났다. 그날 이후 남편은 실로 놀랄 만큼 다정해졌다. 오히려 귀가시간을 당기고 애교를 부림으로써 아이는 아빠의 너그러움에 감사를 표했으며 “거 보세요. 내버려두면 다 알아서 한다니깐”이라며 나는 잘난 척을 할 수 있었다. 사실 그간의 언쟁으로 가장 피곤했던 사람은 남편일 터였으니 그로서도 무거운 짐을 벗은 셈이었다.

진실게임은 내게도 많은 점을 생각하게 했다. 자존심 때문에, 체면을 지키기 위해, 처벌이 두려워서, 시시때때로 하는 거짓말, 혹은 표현하지 않는 내 방식에 대해서. 작금의 우리 사회를 온통 들끓게 하고, 우리들이 꾸려나가는 삶의 수준을 바닥까지 의심케 하는 한 기업가의 행태와 여배우의 죽음, 그리고 그들의 이름 아래 거론되는 리스트에 대해 생각한다. 진실게임을 할 수 있다면, 그들 모두를 한 테이블에 앉힐 수만 있다면….

서하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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