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56>

  • 입력 2009년 3월 24일 13시 41분


한결같음의 위력을 믿는 이들이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루하루를 가꾸는 사람들. 시계 바늘을 닮은 사람들.

석범은 아내 대용 로봇을 구입한 남자들이 당연히 하는 짓이라고 주장했지만, 근육질 알몸뚱이 사내가 곱게 치장한 로봇의 치마를 들어 올리고 그 속으로 자신의 특정 부위를 밀어 넣은 채 사망한 것은 상식적인 장면이 아니다. 더군다나 사랑의 흔적이 다른 사내의 정액이라고 하지 않는가.

석범은 마을 입구에서 차를 세웠다.

미로처럼 꼬인 좁은 언덕길 때문에 더 이상 차를 몰고 들어가기 어려웠다.

변주민의 집은 이 마을 꼭대기에 있었다. 로봇 격투기가 각광을 받으면서 인간 격투가들의 수입은 크게 줄었다. 특히 경마나 경륜처럼 로봇 격투기에 돈을 거는 일이 합법화된 후로는 그나마 있던 남성 관객도 로봇 격투기 쪽으로 몰려들었다. 격투가 협회에서는 인간 격투기에도 판돈을 걸 수 있도록 합법화를 추진했지만, 인간과 인간끼리의 대결로 도박판을 벌이는 짓은 용납되지 않았다.

돈을 벌기 위해 유명해지기 위해 격투가로 접어들었던 이들은 일찌감치 직업을 바꿨다. 격투 자체에 매혹된 어리석은 영혼들만이 가난과 전망 없음을 감수한 채 매일매일 몸을 다듬고 시합에 나섰다. 피 터지게 싸워 이겨도 수입은 변변치 않았다. 째지고 붓고 터진 상처를 치료할 때면 다시는 시합에 나서지 않으리라 다짐도 해보지만, 다음 날 아침부터 가난한 동네의 좁은 골목길을 뛰는 사내들! 변주민도 『특별시연합공용어사전』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변두리 격투가'였다.

격투가들의 이혼율은 평균보다 세 배나 높았다. 열 중 일곱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아내와 갈라섰다. 이유는 갖가지였지만 격투가의 삶을 고집하는 남편과 가족을 위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바라는 아내의 갈등이 가장 컸다. 그래서였을까. 변주민처럼 아예 결혼을 접고 홀로 사는 격투가도 전체의 절반이 넘었다.

동네 사람들이 기억하는 변주민은 수줍음 많고 성실한 청년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새벽 4시 30분이면 집을 나서서 동네 골목골목을 다섯 바퀴 도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격투가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고 가출하여 이 동네로 흘러들어온 뒤 15년 동안 단 하루도 새벽 운동을 쉬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가 붙인 별명이 '알람'이었다. 동료들 사이에선 '틱틱'으로 통했다. 가벼운 '틱'(tic) 증상으로, 고개를 두 번씩 연속해서 왼편으로 꺾었기 때문이다.

병식이 마을 노인들이나 어린이들을 택하여 변주민에 대한 나쁜 기억들을 끄집어내려 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그를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보안청 형사가 왜 살인범은 잡지 않고 피살자의 있지도 않은 약점을 캐고 다니느냐는 것이다.

"그, 그게 변주민 선수의 평소 생활을 알아야 범인을 잡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하여튼 감사합니다. 변 선수는 정말 멋진 청년이었군요. 하하하."

병식은 어색한 웃음만 남기고 석범을 앞질러 걸었다.

변주민의 반지하방은 작고 낡았다. 화장실과 부엌 그리고 침실이 전부였다. 침실 벽에는 20세기의 전설적인 복서 무하마드 알리와 러시아 격투가 에밀리아넨코 표도르의 사진이 나란히 걸렸다. 변주민도 저들처럼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가 되고 싶었으리라. 사진 위에는 분침이 '12'를 가리킬 때마다 나무뻐꾸기가 튀어나오는 골동품 벽시계가 걸렸고 그 아래 변주민의 사체가 놓였다. 두피가 벗겨져 허연 두개골이 드러난 사체는 달링 4호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석범이 왼 무릎을 꿇고 앉아서, 피살자의 잘린 발목과 온몸의 피멍을 살폈다. 달링 4호의 등과 허벅지에도 긁히고 찔린 자국이 여럿 발견되었다.

"으윽!"

갑자기 병식이 입을 막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야식을 챙기지 못해 짜증이 났을 뿐만 아니라 차 안에서 석범에게 야단을 맞은 후 빈 속에 끔찍한 사체를 보니 구역질이 올라온 것이다.

"오셨습니까."

창수가 꾸벅 인사를 하며 다가섰다. 석범은 사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보고한 검시 내용 외에 새로 나온 거라도 있습니까?"

"이상한 일이 하나 더 있긴 합니다."

창수의 작고 날카로운 뱀눈이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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