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9년 2월 24일 02시 57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김 추기경님과의 본격적인 인연은 18년 전인 1991년 여름날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동아일보에 근무했던 나는 행사의 실무 책임을 맡고 있었다. 가장 고민했던 점은 추모사를 어느 분께 맡겨야 하느냐였다. 100주년이 갖는 행사 자체의 무게에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 민족이 겪은 쓰라린 경험을 교훈 삼아 향후 100주년을 조망한다는 취지도 함께 담고 있어 추모사를 해 주실 분의 비중과 역할이 여느 해보다 컸다. 의논 끝에 국민적 신망이 두터운 김 추기경님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내가 부탁을 전하는 중책을 맡았다.
3년 전 나의 대부(代父)였던 홍성철 전 국토통일원 장관의 소개로 김 추기경님에게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지만 인간적인 교감을 할 기회는 없었다. 며칠 후 명동성당 주교관으로 찾아간 나는 “선각자였던 인촌 선생을 위해 추모사를 써 주십시오”라고 간곡히 부탁드렸다.
김 추기경님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며칠 후 나는 다시 용기를 내어 찾아갔다. 이번에는 인촌 선생이 가톨릭 신자인 점을 강조했다. “인촌 선생도 임종을 앞두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추기경님이 먼저 간 신자를 위해, 그의 생애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원고는 저희가 준비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김 추기경은 “그 사람을 모르면서 어떻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난 적도 없는 분의 족적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분에 대해 인간적으로 불성실한 일이지요”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열흘쯤 지났을까.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다시 찾아갔다. “다른 분들을 생각해 보았지만 추기경님 이외에는 적절치 않다는 것이 유족들과 인촌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의 하나같은 뜻입니다”라고 억지를 부렸다. 한동안 묵상에 잠겼던 김 추기경님은 “최 선생의 열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추모사를 하도록 하지요”라며 마침내 응낙했다. 삼고초려가 통한 것이다.
김 추기경님은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인촌 선생을 직접 만나 본 적도, 그분의 생애를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우선 내가 그분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면서 인촌의 자료를 가능한 한 모두 가져다 달라고 했다. 며칠 후 1주일간 해외 출장을 떠나는데 그 기간에 인촌에 관한 자료를 읽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한 인간을 이야기하기 위해 분주한 일과를 쪼개 성의를 다하는 그분의 인격적 풍모, 체화(體化)된 인물을 말하겠다는, 인간에 대한 성실성은 진한 감동이 되어 나의 가슴을 울렸다. 그때의 느낌은 내 일생에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김 추기경님은 추모사에서 인촌 선생을 “담박명지(澹泊明志)의 무욕한 천성을 가진 분”이라며 “천하 인재들의 마음을 샀다”고 평했다. 또 “누구나 그 그늘에 가서 쉴 수 있는 거목”이라고 했다. 나는 이 같은 찬사를 김 추기경님에게 다시 헌사하고자 한다. 김 추기경님의 무소유의 삶과 ‘바보정신’이야말로 담박명지의 결정판이 아니고 무엇이랴.
김 추기경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사회에 사랑과 나눔의 정신을 선물했다. 화해하고 용서하라는 희망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스스로가 하나의 밀알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갔다. 해마다 다시 2월은 오고 꽃은 곱게 피고 바람은 따뜻해지겠지만 다시는 김 추기경님과 함께 그 봄을 맞을 수 없다. 하지만 그분이 주신 은혜와 감동과 영감은 국민에게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