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한국사회의 실력주의

  • 입력 2008년 12월 25일 02시 58분


메리토크라시(실력주의 사회)란 말은 과거 우리 세대의 마음을 부풀게 해준 개념이었다. 서기 2000년을 내다보던 1960, 70년대에 한창 나돌았던 이 말은 미래사회에선 가문이나 신분이 아니라 개개인의 실력을 우선 따져 묻고 그에 따라 사람의 지위와 진로가 좌우된다는 뜻이다. 양반과 상민, 적자와 서자라는 이른바 ‘반상적서(班常嫡庶)의 차대’가 우심했던 전통사회를 박차고 세차게 나라의 근대화를 추진했던 당시에는 실력주의 사회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사회라 여겨졌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2000년대 초의 한국사회는 메리토크라시란 말을 새삼 되뇔 필요도 없으리만큼 모든 영역에서 실력주의가 발휘되는 세상이 된 듯싶다. 이제는 족보나 학벌, 심지어 남녀의 성별도 따지지 않게 됐다. 고기잡이 자식도, 대학을 못 나오고 상업학교만 나와도 본인만 똑똑하면 대통령이 될 수 있고 실제로 되기도 하는 나라가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실력이 무엇인가. 개개인이 지닌 능력, 갈고닦은 능력이다. 출신성분은 큰 문제가 아니다. ‘누구냐’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얼마나 잘할 수 있느냐로 판가름되는 것이 실력이다. 실력주의 사회에선 사람의 ‘존재’가 아니라 사람의 ‘행동’에 의해서 사람의 값어치가 평가된다.

국회의원은 리더십-언변이 기본

물론 실력이란 사람의 능력처럼 다양하다. 공부하는 사람에겐 학력이 실력이요 운동하는 사람에겐 체력이 실력이다. 물론 돈 버는 사람에겐 돈을 많이 번 재력이 실력이다.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계의 연예인에겐 매력도 실력이다. 조폭의 세계에선 완력이 실력일 수 있다.

정치가에게 있어 실력은 무엇일까. 사람을 이끄는 지도력, 이른바 리더십이다. 물론 지도력의 원천도 다양할 수 있다. 금권정치, 파벌정치에서는 많은 정치자금을 긁어모으는 재주가 지도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뭇사람의 숭앙을 받는 혁혁한 과거의 업적이 지도력이 되고 또는 많은 사람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을 줄 수 있는 경륜이 지도력이 되는 것이 정상이다.

정치가가 국회의원이 되려면 그러한 지도력만으로는 안 된다. 정치가는 국회에 들어와야 비로소 국회의원이 되고, 국회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사림을 이끄는 지도력보다 많은 사람(유권자)의 표를 모으는 득표능력이 뛰어나야 된다.

득표능력도 다시 여러 가지로 그것은 조직력과 자금력에도 크게 좌우된다 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유권자의 표심을 잡을 수 있는 후보자의 설득력,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입심, 언변(言辯)이 바탕이 된다. 서양에서 의사당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말의 집’ ‘언변의 전당’이란 뜻이다. 레토릭(언변술)은 원래 ‘에클레시아(시민집회)’라고 하는 고대 아테네의 직접 민주정치와 함께 발달해 왔다. 세계의 동서 어디서나 무력이, 폭력이 지배하고 있던 고대 세계에서 오직 아테네에서만은 세 치도 못 되는 혀의 설득력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다는 ‘헬라스의 기적’이 레토릭을 키운 근원이었다.

언변이 없으면 언변의 전당에 들어갈 수 없다. 말을 못하는 국회의원, 말을 않는 국회의원이란 마치 글을 모르는 선비, 칼을 못 쓰는 사무라이처럼 자기모순이요 자기부정이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국회의원의 기본적인 자질이요, 그것이 곧 국회의원의 실력이다.

‘실력저지’가 ‘완력대결’이라니

여당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법안 상정을 야당이 실력저지 하겠다고 나섰다. 여당의 실력은 적지 않은 부분이 의석수라는 양에 있다면 야당의 실력은 적은 의석수로도 국민을 감동시킬 수 있는 설득력의 질에 달려 있다. 야당이 여당을 그러한 실력으로 저지한다면 오랜만에 국회의사당에서 불꽃 튀는 레토릭의 일대 설전을 보게 되리라 기대해봄 직했다. 그러나 여의도 의사당이 보여준 것은 여야 간 기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요, 말의 힘이 아니라 주먹의 힘, 망치, 몽둥이를 휘두르는 폭력의 힘이었다.

한국 국회의원의 실력이란 결국 조폭의 실력처럼 완력이란 말인가. 앞으로 국회의원을 뽑을 때엔 이종격투기장에 후보자를 올려 그 실력을 검증하란 말인가. 국회의원 스스로 국회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이런 국회도 있어야 한다는 점을 어떤 실력으로 설득할 것인가.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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