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상영]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 입력 2008년 10월 30일 02시 59분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는 국제금융시장을 ‘화재가 예고된 무도회장’에 비유했다. 시점은 모르지만 반드시 불이 나게 돼 있으므로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은 무조건 출입구 쪽에 가깝게 있으려고 하고 이것이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금융의 글로벌화로 막대한 자금력을 가진 헤지펀드가 단기수익을 좇아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면서 생겨난 현상에 대한 통찰이었다. 다시 해석하면 출입구에서 멀리 떨어져 깊게 들어가면 만일의 경우 불이 났을 때 위험하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적절한 비유였다는 생각이 든다.

무제한적 금융자유 더는 곤란

국제금융시장을 선도하던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IB)들은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무도회장 깊숙이 안쪽에서 춤을 추다 이번 화재로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헤지펀드들도 대부분 큰 타격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무도회장의 위험성조차 제대로 모른 채 어설픈 춤 흉내를 내던 한국의 금융회사들도 부상했다. 자신만 다친 것이 아니라 국가경제와 투자자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줬다.

이제 초미의 관심사는 세계가 ‘불이 안 나는 무도회장’을 어떤 형태로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번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기존 금융시장의 기능은 사실상 정지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국 공히 정부가 개입하지 않고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금융시장에 주어졌던 거의 무제한적인 자유는 상당 부분 제약을 받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에서는 이미 금융산업에 관한 한 “자유방임의 시대는 끝났다”(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는 징후가 농후하다. 평소 시장을 강조해 온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조차 이제는 국가의 적극적 개입, 시장의 제한, 인위적 경기부양을 주장한다. 독일 사민당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총리후보는 “마거릿 대처, 로널드 레이건과 함께 시작했던 자유시장 신봉자들의 주장이 금융위기와 함께 끝났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키는 여전히 미국이 쥐고 있다. 이번 위기의 여파로 국제금융시장의 주도권을 유럽 중국 일본에 어느 정도 나눠준다 해도 압도적 파워는 여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금융위기 이후 어느 방향으로 가닥을 잡을지는 새로운 행정부가 들어선 뒤에나 구체화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5일 남은 미국의 대선은 전 세계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은 일단 부실 금융회사들에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하기로 했고 이어 경영난에 허덕이는 자동차회사 GM과 크라이슬러에 대한 구제금융을 논의하고 있다. 시장에서 스스로 살아남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시켜야 한다는 시장주의와는 다른 행보다.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든 몇 가지 예상은 가능하다. 헤지펀드 같은 단기자금의 국가 간 이동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국제적인 규제가 뒤따를 것이다. 석유와 광물, 곡물 같은 자원까지 증권화해 투기수요를 만들어냈던 파생상품에 대해서도 감시의 눈길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금융회사들에 대한 건전성 감독은 크게 강화될 것이다. 이런 국제금융질서 재편을 앞두고 미국과 유럽 사이에는 이미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정책이 정쟁에 흔들려선 안돼

한국 정부는 세금을 줄여주고 재정 지출은 늘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적자재정을 편성해서라도 시장에 대한 정부 개입을 늘리겠다는 뜻이다. 1929년 대공황 때 미국이 사용했던 정책과 비슷하다. 이명박 정부로서는 억울하겠지만 작은 정부 공약을 일단 접은 셈이다. 이번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처럼 당초 정체성과는 다른 정책을 취해야 하는 일이 얼마든지 더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거기에 맞는 정책을 선택하는 것이다. 사안에 따라 좌파적 정책도, 우파적 정책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권이 이런 공감대를 갖고 위기 극복에 협력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정책이 정쟁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지금이야말로 이 대통령이 주창한 ‘실용주의’가 빛을 발해야 할 때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무슨 상관이 있는가. 쥐만 잡으면 되는 것이다.

김상영 편집국 부국장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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