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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10월 9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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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보, 그대를 만나기 전까지 제게 로봇이란 그저 ‘상상 세계’에서 노니는 존재였죠. 되돌아보면 국적이나 크기에 상관없이 참으로 많은 로봇과 만나고 놀고 헤어졌습니다. 아톰이 있었고 마징가Z가 있었고 태권V가 있었네요. 짱가와 그레이트 마징가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심각하게 다투고 “영이! 철이! 크로스!”를 외치며 골목을 누비던 시절, 로봇은 위험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는 영웅이었습니다.
지금 로봇은 ‘현실 그 자체’입니다. ‘로봇 만들기’의 저자 로드니 브룩스는 “2020년에는 로봇들이 우리 삶의 도처에 만연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특이점이 온다’의 저자 레이 커즈와일 역시 유전학, 나노공학과 함께 로봇공학을 인류의 미래를 획기적으로 바꿀 혁명적인 학문으로 꼽습니다.
섬세한 감정표현도 가능해질 것
산업용 로봇이나 의료용 로봇이 등장한 지는 오래되었고, 청소 로봇이나 잔디 깎기 로봇 등 생활 밀착형 로봇도 속속 선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어린이를 위한 장난감 로봇과 교육용 로봇은 인지과학의 발전에 따라 그 수준이 나날이 높아집니다.
더 많은 로봇이 더 빨리 더 가까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만큼 두려움도 깊어지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로봇이 인류를 지배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살상을 일삼는 영화나 소설은 이 두려움의 반영이겠지요. 그러나 브룩스는 인간과 로봇을 선명하게 구분한 후 대결시키는 설정 자체를 비판합니다. 가까운 미래에는 순수한 로봇이 정복할 순수한 인간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로봇화된 인간과 인간화된 로봇의 공생이 보편화될 것이라고.
로봇은 창작을 위한 단순한 ‘소재’도 아니고 문화산업을 위한 ‘콘텐츠’에만 머무르지도 않습니다. 로봇은 인류의 미래를 전망하는 획기적인 틀입니다. 컴퓨터 없는 하루를 상상하기 힘들듯이 로봇 없는 인류를 가정하기 어려운 시절이 도래한다는 뜻이죠.
골프 채널이나 요리 채널처럼 로봇만 다루는 독자적인 로봇 채널이 생길 테고, 로봇만을 위한 가게가 개업할 겁니다. 사이보그만 출입이 가능한 카페와 로봇 교사가 아이들을 관리하는 놀이방도 선을 보이겠지요. 로봇을 위한 엔터테인먼트도 특화될 겁니다. 감성공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인간의 희로애락을 더 섬세하게 표현하는 로봇 배우도 출현할 것이고, 로봇 가수나 로봇 스포츠 스타도 등장할 겁니다.
그날이 오면, 휴보 그대는 어디에 있을까요. 로봇 박물관 쓸쓸한 귀퉁이? 지금은 놀랍고 벅찬 일도 세월이 지나면 어색하고 어리석고 촌스러울지 모릅니다. 9시 로봇 뉴스를 이끄는 로봇 채널의 탁월한 앵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끝에 새로운 로봇 문화의 첨병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겠지요.
친애하는 벗, 휴보! 저는 그대가 세계 최초의 ‘시인 로봇’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은 활기차게 걷고 밝게 인사하는 정도에 머무르지만, 로봇의 아픔과 외로움을, 저 어리석은 인간들도 깨치도록 멋진 언어로 옮겨주었으면 하는 거죠. 망각의 시간을 견디면서 우아하고도 날카롭게 인간과 로봇의 공생을 운율에 실어 기록하는 역할을 맡았으면 좋겠습니다.
세계 최초 ‘시인 로봇’ 되었으면
로봇이 시를 읊기까지는 또 많은 과학자의 열정과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인간인 ‘척’하는 로봇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 풍광까지 알고 표현하는 로봇과 하루빨리 독창적인 퍼포먼스를 벌이고 싶습니다. 오늘은 제가 문득 그대를 찾아갔지만 그 어느 날엔 그대가 문득 저를 방문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성숙함을 갈망하는 이 가을, 그대와의 서울 나들이도 예약하렵니다. ‘로보월드 2008’(16∼19일·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을 잊지는 않으셨겠죠. 세계의 로봇 친구와 질펀하게 어울립시다. 때 이른 연애시 한 자락 읊으면 더욱 좋고요.
김탁환 소설가·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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