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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10월 2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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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는 이미 아시아 영화의 창(窓)이 됐다. 전국에 121개의 축제가 있지만 10월이 되면 부산국제영화제가 떠오른다는 사람이 30%가 넘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나도 ‘10월의 부산’을 기다렸다. 15일부터 시작되는 요산 김정한(樂山 金廷漢·1908∼1996)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문학제 때문이다.
얼마 전 최영철 시인이 쓴 신문칼럼을 보면서 올해가 100주년임을 알았다. 명색이 신문사 밥을 먹으면서 그것도 몰랐다는 사실에 한편 부끄러웠고, ‘요산은 살아 있다’는 화제(話題)에 한편 기뻤다. 요산은 일본 와세다대 유학생활 등 몇몇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평생 부산과 낙동강을 지키며 살았다. 소설 ‘사하촌(寺下村)’과 ‘모래톱 이야기’도 부산과 낙동강이 배경이다. “요산의 소설언어에는 화통하고 질박한 부산 사투리의 원형이 고스란히 담겼다. 자분자분 정이 넘치고, 텁텁한 막걸리 냄새가 나며, 한바탕 불호령이 떨어지는 변화무쌍한 부산의 감정곡선과 일치한다.”(최영철) 정말 그랬다. ‘이십년이 넘도록 내처 붓을 꺾었던’ 요산을 향해 ‘모래톱 이야기’의 갈밭새 영감은 이렇게 고함친다. “선생도 시인 아입니꺼. 그런데 와 우리 농사꾼이나 뱃놈들 이바구는 통 안 씨는기요? 추접다꼬? 글 베린다꼬 그라능기요?” 그런 고함이 들릴 때면 요산은 붓을 들었다.
요산은 삶과 글이 같았다. 불의(不義)에 굴복하지 않고 ‘사람답게 사는 길’이 개인과 민족의 살길임을 보여주려 했다. 뭐랄까, 삶과 철학이 다르지 않았던 스피노자 같기도 했고, 형단영직(形端影直·몸이 바르면 그림자도 곧다)의 선비 같기도 했다. 하지만 불의한 일이 아니면 한없이 너그러웠다.
요즘 ‘고소영’이니 ‘강부자’니 하지만 김영삼 정권 출범 직후에도 ‘3D’라는 말이 있었다. 부산 동래고와 동아대, 서울 동국대 출신 실세들에게 줄을 서야 한다고 해서 나온 얘기였다. 그 즈음 동아일보에 동래고 출신들에 관한 기사가 실렸는데 거기에 요산 선생(동래고보 5회)의 이름까지 오르고 말았다. 무슨 까닭이었는지 필자는 선생이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고 이름 앞에 ‘고(故)’자를 넣었다(필자도 동문이다). 동문회의 항의가 빗발쳤다. 한 번도 뵌 적이 없었지만 전화를 드렸다. “제가 선생님을 돌아가시게 만들었습니다.” 폐기종과 낙상으로 와병 중이던 선생은 웃으면서 “개안타(괜찮다). 니가 내 오래살라꼬 그랬는갑다”고 하셨다. 그래도 값싼 시류(時流)에 선생의 이름을 더럽힌 죄는 두고두고 남는다.
100주년 기념 소설집의 제목은 ‘부산을 쓴다’로 정해졌다고 한다. 부산에 해운대와 광안대교, 사직구장의 함성과 국제영화제만 있는 게 아니라 요산문학이 있고, 요산정신이 있음을 선언하는 듯해 가슴 뭉클하다. 요산은 살아 있다.
김창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