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상인]TV의 공공장소 무단점거

  • 입력 2008년 5월 21일 03시 01분


누가 뭐래도 텔레비전에는 나름대로 미덕이 있다. 그 많은 정보와 교양과 오락을 그토록 값싸고 편하게 전달하는 매체가 또 달리 있을까. 텔레비전의 해악을 면책하자는 의도가 결코 아니다. 때에 따라 그것은 지적 판단을 흐리게 하고 대인관계를 메마르게 만들며 건강 또한 해칠 수 있는 불순하고도 위험한 미디어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V 없는 세상’은 현실적으로 물 건너갔다. 각종 TV 안 보기 운동이나 TV 끄기 캠페인이 대개 TV와의 시한부 전쟁에 머물러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차피 ‘텔레비전을 볼 건가 말 건가(TV or not TV),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면 남은 과제는 TV 있는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이럴 때 공공장소의 좋은 상석이나 넓은 공간을 거의 예외 없이 텔레비전이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은 자못 유감스럽다. 이는 세계적 기준에서도 과도해 보이기도 하지만 웬만큼 산다는 선진 문화강국과도 뚜렷이 비교된다.

가령 언제부턴가 기차역이나 공항, 버스 터미널의 가운데는 대형 텔레비전 수상기의 차지가 되어 버렸다. 은행이나 병원, 우체국 등에서도 텔레비전은 시나브로 필수 인테리어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터미널-관공서 대형TV 넘쳐

버스나 항공기, 선박 내부를 평정하다시피 한 텔레비전은 열차를 거쳐 목하 지하철까지 침투 중이다. 학교 휴게실에도 걸핏하면 텔레비전이 있다. 각급 관공서도 예외는 아니다. 얼마 전 주민센터로 개명한 동사무소는 물론이고 경찰서나 정부중앙청사 민원실에서도 텔레비전은 늘 환하게 켜져 있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람이 찾고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TV가 따라간다. 명분은 이른바 고객 서비스다. 그래서 이를 당연시하거나 고맙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이런 선의(善意)의 이면에 공공장소의 다른 불편사항을 감추거나, 떠드는 아이들을 조용하게 만들거나, 혹은 방문자로 하여금 그곳 근무자들을 귀찮게 하는 행위를 삼가도록 하는 목적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누가 쉽게 품겠는가. 하루 평균 3, 4시간으로 이미 전 세계에서 TV를 가장 많이 보는 편에 속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향해 ‘공공장소에서 왜 또 텔레비전을 찾느냐’고 따지는 것도 별로 소용이 없다. TV에 잔뜩 중독된 사람들에게 다만 몇 분이라도 TV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인내심이나 자존심도 없느냐고 묻는 것 또한 공연한 참견으로 비칠 게다.

따라서 더 실질적인 문제는 공공장소에서의 텔레비전 시청 고객 서비스가 너무나 일방적이고 무차별적이라는 점이다. 개인의 의지나 노력으로 그것을 사절하기가 도저히 쉽지 않기에 현재와 같은 공공장소는 결코 민주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좀 더 정의로운 세상이 되려면 공공장소에서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환경과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여건이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TV를 좋아하는 다수자의 편익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동조하지 않는 소수자의 권익도 보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대신 책을 읽자는 식의 ‘잘난 척 고상한’ 주장을 하는 게 전혀 아니다. 공공장소에서 잠을 청하든 대화를 나누든 신문을 보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며, 그러한 권리는 내가 남을 방해하지 않는 한 나도 결코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고자 할 뿐이다. 게다가 지상파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단말기 수가 최근 1000만 대를 돌파한 우리나라 현실에서 공공장소마다 공용 텔레비전을 비치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낭비다. 그래도 굳이 그곳에 텔레비전이 필요하다면 몇 개의 좌석에 개인용 유료 TV를 부착하거나 TV 시청 전용 밀폐공간을 설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마치 흡연실처럼 말이다.

시청 거부할 자유도 마련돼야

각 개인의 취향과 자율이 존중되는 고품격 사회로 나아가야 할 시점에 텔레비전이 공공장소를 무단 점거한 채 그곳을 문화적 식민지로 삼고 있는 작금의 현상은 용납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제는 금연 캠페인이 직접 흡연으로부터 간접 흡연 영역으로 점차 확대되는 것처럼, 공공장소에서 원치 않게 겪어야 하는 TV ‘간접 시청’의 폐해도 슬슬 정리할 때가 됐다. 안 그래도 심각한 노상의 생활소음까지 감안한다면 공공장소에서의 ‘실내 정숙’은 한시가 급하다. 조용한 일상(日常)도 문명의 지표며 인권의 척도다.

전상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사회학 sangin@snu.ac.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