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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4월 23일 20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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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침묵이 미덕일 수 없는 분야가 정치다. 정치행위는 기본적으로 말을 수단과 도구로 삼아 이뤄진다. 말 잘하는 것은 정치인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능력이다. 별 볼일 없던 아칸소 주지사에서 미국 대통령이 된 빌 클린턴이나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로 스타 탄생을 예고한 지 4년 만에 유력 대통령 예비후보가 된 버락 오바마 초선 상원의원은 정치인에게 있어서 ‘말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그런 정치에서도 때로는 침묵이 고도의 정치행위가 될 수 있다. 침묵의 정치는 고난도의 정치력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만큼 침묵을 잘 활용하는 정치인도 흔치 않다. 그는 절제된 발언과 침묵을 절묘하게 활용해 대중의 관심과 궁금증을 증폭하고 말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능력을 보여 왔다. 신문에 자신의 발언이 나오지 않아 안달하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지만 그는 침묵과 칩거까지 큰 뉴스로 확대 재생산하는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박 의원이 ‘침묵과 칩거 정치의 달인’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2006년 5·31지방선거 당시 얼굴에 자상(刺傷)을 입은 그가 측근에게 했다는 “대전은요?”라는 한마디는 대전시장 선거 결과를 뒤집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이번 총선 때 그는 한나라당 공천을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고 단순 명쾌하게 압축한 뒤 침묵했다.
한나라당 공천에 반발해 탈당한 후보들을 위해 “살아 돌아오시라”고 한 짧은 덕담(德談)은 친박연대와 친박 무소속 후보들의 무더기 당선이란 괴력을 발휘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위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박 의원이 총선 직후인 11일 대구 달성군 자신의 선거사무소에서 친박 당선자들과 만나 한나라당 복당 문제를 언급한 이후 2주 가까이 침묵의 정치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그제 한나라당 18대 총선 당선자 워크숍은 물론이고 청와대 만찬에도 가지 않았다.
그의 불참은 친박 무소속과 친박연대 당선자들의 한나라당 복당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데 대한 항의의 표시로 해석된다. 본인은 말이 없으니 “복당 문제가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측근의 말로 그의 심경을 헤아릴 뿐이다.
그는 이번 총선에서 당선돼 4선 의원이 됐고 당 대표까지 지냈으니 당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옳았다. 당원의 도리 측면에서도 그랬어야 했다. 침묵의 정치도 남용하면 효과가 떨어지기 쉽다. 정치인은 중요한 현안에 대한 주장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정치인에 대한 평가는 그 기록들에 대한 평가라고 할 수도 있다. 민감한 정치 현안이라고 해서 대화를 피하는 것도 옳은 태도가 아니다.
박 의원은 4년 전 대표 시절 천막당사에서 열린 17대 총선 당선자 대회 날 헌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민생정치는 이런 활동으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봉사하고 사랑하는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데 정치권부터 앞장서자.” 박 의원은 복당 문제는 대화로 해결하고 민생 정치의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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