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8주년]‘건국60돌-헌정60돌’ 이철승 헌정회장 인터뷰

입력 2008-04-02 03:03수정 2009-09-2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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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승 헌정회장은 86세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억력과 목소리가 또렷했다. 악수를 하는 손에도 힘이 느껴졌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과 헌법 제정 과정에는 수많은 선배의 우국충정이 깃들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런 사실을 더 널리 알리는 데 아직도 자신이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 믿고 있었다. 김경제 기자
이철승 헌정회장(오른쪽)이 보성전문(고려대의 전신)의 교정을 배경으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운동으로 단련된 다부진 체격의 이 회장은 학창시절 학병거부운동, 반탁학생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사진 제공 서울평화상문화재단
“1948년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 세운 건 민족적 쾌거”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에 있는 ‘대한민국 헌정회’에서 소석 이철승(素石 李哲承·86) 헌정회장을 만났다. 사무실의 양쪽 벽에는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와 제헌의회 국회의장을 지낸 해공 신익희 선생의 사진 걸려 있었고, 그 밑에는 각각 흉상이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에서 올해가 ‘건국 60주년’이자 ‘헌정 60주년’이라는 사실(史實)의 무게가 느껴졌다. 이 회장은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 공간에서 한국민주당의 학생조직을 맡아 건국에 기여했다. 특히 그는 1946년 1월 ‘반탁(反託)전국학생연맹’의 위원장을 맡아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에게 소회를 묻자 “사람도 60세면 뜻 깊은 일인데, 우리가 만든 나라와 헌법이 60년이 된다니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대담=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대한민국 건국 과정을 직접 체험하셨던 분으로서 감회가 남다르실 텐데요.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를 어떻게 보십니까.

“해방정국은 좌로 가느냐, 우로 가느냐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때였습니다. 만일 대한민국을 세우지 못하고 우리가 지금 북한과 같은 상태였다면 심정이 어땠을까요. 일제를 몰아내고 우리를 해방시킨 미소 연합국이 신탁통치를 강요할 때 우리는 뛰어난 지도자들과 국민적 의지를 합쳐 반탁운동에서 승리했습니다. 헌법 전문과 같이 3·1정신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서 자유민주국가를 수립하고, 유엔으로부터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을 받아 정통성을 확립한 것은 단군 이래 최대 쾌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찬탁(贊託)과 반탁(反託)의 갈림길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선택했던 것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정치는 결과의 책임’이라고 했습니다.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대한민국의 세계화된 오늘의 모습과 신탁통치를 찬성했던 북한이 고립무원 상태에 빠진 현재의 실정은 어떤 선택이 옳았는지를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5·10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를 구성하던 때를 돌아보신다면….

“미국이 3국 외교장관회의(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인 ‘신탁통치’가 국내의 반발에 부닥치자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넘겼어요. 한국에 들어온 유엔감시위원단은 북한에 못 들어가자 ‘가능한 지역(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치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당시 인구 비례로 이남의 인구가 3분의 2를 차지했기 때문에 이남에 200석을 배정하고 100석은 북한을 위해 남겨 뒀습니다. 언젠가 북한이 민주선거를 통해 동참하면 통일국회가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지요. 당시 북한이 총선에 참여했다면 통일도 되고 동족 300만 명이 목숨을 잃는 6·25전쟁의 비극도 없었을 겁니다. 북한이 지금 저렇게 굶어 죽는 세상도 안 됐을 테고….”

―올해는 헌정 6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 헌법이 지니는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헌법은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는 모든 법의 모법(母法)입니다. 따라서 헌법은 어느 정권이나 정치권력이 훼손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헌법은 9번 개정됐습니다. 그래서 ‘누더기 헌법’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헌법은 민의와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얼마든지 시대에 맞게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치권자가 권력 유지나 연장을 위해 헌법을 자의로 개정하려다 보니까 헌법이 유린되고 훼손되는 파동이 생겼던 것입니다. 어떤 대통령은 ‘그놈의 헌법’이라고 내동댕이친 적도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의 헌법은 소중히 지켜 나가야 합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수많은 이념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를 극복한 대한민국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우리 한민족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한 번도 바람이 가셨던 때가 없습니다. 그래도 ‘쇠심줄’같이 질기게 어려운 고비를 버텨 왔습니다. 저는 이게 국운(國運)이라고 봅니다. 수많은 선대 지도자와 국민의 희생으로 대한민국이 이렇게 번영하고 세계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참 다행이지요. 우리 한민족에겐 희망이 있다는 걸 젊은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요즘 국회의원 선거가 한창입니다. 후배 정치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없나요.

“전직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헌정회는 1000여 명의 회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당정치의 기본은 책임정치라고 배웠습니다. 예전엔 당이 공천하고 국민이 투표해서 국회의원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국민이 투표도 하기 전에 여론조사를 통해 후보를 결정하는데,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배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관록이나 전통, 능력도 중요합니다. 풋내기들이 들어와 그저 바람만 일으키면 된다는 생각이 통하는 것은 나라가 그만큼 경박해졌다는 증거입니다.”

―올해 새롭게 출범한 이명박 정부에 주문할 것이 있다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합친 10년을 보통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들 하는데 저는 ‘도적맞은 10년’이라고 말합니다. 6·25전쟁을 일으켜 동족 300만 명을 희생시킨 북한은 아직도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국군포로나 납북자를 송환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저 왔다 갔다 하는 것을 평화 교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명박 정권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되찾아올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리=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이철승 헌정회장

△전주고, 고려대 법학과 졸업

△1946년 반탁전국학생총연맹 위원장, 전국학생총연맹 대표의장

△1970년 신민당 전당대회 대통령 후보 경선

△1973년 제9대 국회부의장

△1975년 제30차 유엔총회 한국 대표

△1985년 대한체육회 고문(현)

△3, 4, 5, 8, 9, 10, 12대 의원(7선)

△1996년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현)

△2007년 대한민국 건국단체총연합회 대표의장(현)

△2007년 대한민국헌정회 회장(현)

▼인촌 김성수 선생과의 인연▼

사제지간으로 만나 반탁 보필

“인촌 지시 받아 학병거부 운동”

이철승 헌정회장은 1942년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 법학과에 진학하면서 동아일보 창립자이자 당시 보성전문의 교장이었던 인촌 김성수(1891∼1955)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사제지간으로 시작된 인연은 광복 후에도 이어져 반탁운동의 와중에서 이 회장은 한국민주당의 경비대장 역할을 하며 인촌을 가까이에서 보필했다.

“일제강점기 전주고 시절 일제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일본인 장교를 목검으로 두들겨 패 무기정학을 받았습니다. 학적부에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고 적혀 있었고, 조행(操行·품행) 성적도 ‘丙(병)’ 아니면 ‘丁(정)’이었어요. 중학교 때 운동을 잘해 처음에는 일본의 체육학교로 가려고 했지요. 그러나 나중에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중부(仲父·이주석)의 권유로 민족사학인 보전에 가게 됐지요.”

이 회장은 일제강점기 말 학도병에 강제로 끌려가게 됐을 때 “인촌 선생의 지시로 서울시내 다른 대학과 연합해 ‘학병 거부 운동’을 벌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사전에 적발돼 무산됐다. 그러자 이 회장은 보성전문, 경성제대, 연희전문, 명륜전문, 혜화전문 학생 대표들과 함께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총독을 찾아가 “대동아지역 해방을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이라면 한국부터 먼저 해방시키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일제는 최남선 이광수 등 지도자급 인사들을 불러 학생들에게 학병을 가라고 권유하는 글을 쓰고 연설을 하게 했어요. 그러나 인촌은 ‘나는 학부형들로부터 교육하라고 여러분을 맡았지, 입영을 시키라고 맡은 게 아니다’며 학병 권유를 거부했습니다. 매일신보에 난 학병 권유 글은 매일신보 김병규 기자가 인촌 이름으로 쓴 것입니다. 이 사실은 유진오 박사의 ‘양호기’에도 나옵니다. 인촌은 보전 학생들의 학병 출정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어요.”

이 회장은 “인촌은 사재를 털어 교육기관(보전)과 언론사(동아일보), 기업(경성방직)을 만들어 민족의 백년대계를 준비한 지도자”라며 “36년간 일제 밑에서 동포들과 동고동락하며 이렇게 많은 일을 한 것은 지혜와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고하 송진우 선생이 타계한 뒤 한민당을 이끌던 인촌은 당내 최고의결기구로 전국 각 지역 출신의 8총무를 두었고, 자신은 대표가 아닌 수석 총무를 맡았던 민주적인 지도자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을 가 조그만 집에서 머물던 인촌을 모시기도 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민심 수습을 위해 인촌에게 부통령직을 부탁했다”며 “부통령이 된 인촌은 대통령에게 거침없이 직언을 했다. 인촌이 부산 정치파동, 거창 양민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을 규탄하면서 낸 부통령직 사퇴 이유서는 명문이었다”고 회고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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