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정은미]부자 지갑을 연 피카소와 워홀

  • 입력 2008년 3월 8일 02시 52분


‘돈 버는 것이 최고의 예술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한참 전의 카피를 기억하시는지. 달러를 왕창 인쇄한, 꼭 싸구려 광고지 같은 작품들이 배경이었다. 압권은 삐죽빼죽 까치 머리를 한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퀭한 눈빛….

1960년대 미술계는 예술가가 돈 버는 것에 대해 유난히 ‘내숭 떨던’ 시기였다. “비즈니스는 예술이고 예술은 비즈니스다”라고 외치고 다녔던 워홀. 정작 그 자신은 후일 성공한 작가의 아이콘이 될 것이라 상상이나 했을까. 동네 슈퍼마켓에 널려 있는 합성세제 박스를 ‘팝 아트’라 우기고 할리우드 스타인 양 뿌리고 다닌 스캔들은 대중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더욱 재밌는 일은 평론가들이 워홀을 ‘사기꾼’이라 경멸하고 ‘속물’이라 비난할수록 워홀의 작품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는 점이다. 감각이 남달랐던 워홀의 안목은 당시 미술 시장에서 제대로 먹혔다. 돈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소비사회’를 겨냥했기 때문이다. 미국 주류사회의 고상한 추상표현주의에 반감을 가진 일반 대중의 저항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한 워홀의 기획력은 당시 시대상을 감안할 때 대단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예술 마케팅에서는 사실 파블로 피카소가 원조 격일 듯싶다. 시인과 평론가 등을 끌어들인 치밀한 홍보 작업, 언제나 사회적 이슈를 불러일으키는 파격적인 그림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엄청난 작업량에 누가 감히 토를 달겠는가. 지칠 줄 모르는 여성 편력마저도 ‘세기가 낳은 천재’라는 신화로 배짱 좋게 포장한 피카소는 부자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게 했다. 아흔이 넘도록 변덕스러운 미술시장에서 파죽지세를 보인 피카소는 부와 명성, 사랑까지 거머쥔 예술가였다.

예술가와 돈의 관계. 그리 새삼스럽진 않다. 중세 암흑기를 벗고 문예부흥기로 넘어간 르네상스가 고리대금업자(메디치 가문)로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교회에 속박된 일개 장인을 ‘예술가’로 풀어 준 것은 다름 아닌 ‘돈’이었다. 물론 창조의 원동력은 가난에 있고 굶주림 속에 예술정신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 돈 복 없는 화가도 허다했다. 천재성이라면 피카소에게 결코 뒤지지 않지만 술, 마약 그리고 지독한 가난과 고독으로 점철된 비운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가 대표적인 사례다.

요즘 미술계에 불어 닥친 비즈니스 바람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피카소와 워홀의 성공 사례는 미술시장을 설명하는 그 어떤 지루한 이론보다 훨씬 의미 있게 다가온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기발한 시각과 안목으로 미술시장의 수요를 정확히 간파하는 것은 탁월한 기량이다. 원래 ‘예술과 돈’의 관계란 너무 멀어도, 가까워도 안 되는 미묘하고 복잡한 것이지 않던가. 예술가들의 성공에 대한 열정이 예술 혼을 불태운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은 거스를 수 없는 명제다.

워홀과 피카소는 현대 미술계가 원하는 스타성에 기대 이상으로 화답했다. 사후에도 여전히 명성과 부를 쌓아가는 거장이다. 지금도 자신의 작품에 열광하는 이들에게 미술관 입장료나 경매 수입을 받고, 심지어 저작권료까지 챙기고 있으니 말이다. 작가들은 저세상에서 이를 바라보며 진짜 ‘행복한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을까.

현대미술이 마치 연예나 스포츠 산업처럼 시장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스타 작가의 탄생! 한국 미술계에도 꼭 필요한 과제다. 거장 반열에 오르는 작가를 키우려면 작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예술 분야 기대주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인식의 전봇대’가 우리 주변에 없는지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할 것이다.

정은미 화가·명지전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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