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민웅]후보들의 말과 연기에 현혹되지 않으려면

  • 입력 2007년 10월 24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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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사조 가운데 ‘언어 결정론’이라는 게 있다. 이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사회 현실은 언어를 매개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말, 글, 영상 등 언어로 구성되는 텍스트가 곧 현실이기 때문에 텍스트 바깥에 실재하는 현실을 구태여 준거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자크 데리다의 유명한 언명, “텍스트가 모든 것이고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를 생각해 보자. 진실은 실재하는 사실이 아니라 언어의 결과라는 것이다. 말과 글과 영상으로 그럴듯하게 꾸며서 미디어를 통해 확산하면 그것이 바로 진실이 된다는 말이다. 심지어 어떤 포스트모던 인류학자는 만약 특정 언어에 오르가슴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오르가슴을 느낄 수 없을 것이라고 극단적인 언어 결정론을 주장한다.

언어 결정론을 가장 충실하게 따르는 직종 가운데 하나가 정치인일 것이다. 지금 각 당의 대통령 후보들은 많게는 수십 명에서 적게는 열댓 명의 홍보요원을 두고 이들의 보좌를 받아 가며 어떻게 말해야 국민의 마음을 살 수 있을까 하고 말 포장에 골몰하고 있다. 홍보는 나쁜 것을 좋게 보이게 하고, 좋은 것을 더 좋게 보이게 하는 화장술이 아니다. 있는 것을 없게 하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마술은 더더욱 아니다. 홍보는 공중이 사실을 더 잘 이해하도록 제시하는 기법이다. 실재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지, 실재 이상이나 이하로 평가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들통이 나면 홍보 주체의 신뢰도를 심각하게 훼손하기 때문이다.

국민 마음 홀릴 포장에 골몰

그러나 이런 순박한 원론적 얘기는 ‘더러운 정치’ 영역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다. 정치 행위의 기본 수단은 언어다. 그래서 정치인은 대개 말을 잘한다. 그냥 잘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허풍도 치고 거짓말도 하고 심지어 속이기도 한다. 예컨대 명예훼손, 무고, 사기, 공무원 사칭 등으로 실형 선고를 받은 김대업을 ‘의인(義人)’으로 만들기도 했고, 전두환 정부의 ‘보도지침’보다 더 악질적인 취재 봉쇄 조치를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20 대 80 운운하면서 ‘놈현스러운’ 이념 논쟁을 재탕하면서도 그럴듯하게 ‘가치 논쟁’으로 둔갑시킨다.

영상시대에는 말만 잘해서는 부족하다. 표정 연기도 좋아야 한다. 표정도 언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배우가 되었다면 ‘대종상’을 받았을 만큼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정치인도 있다. 안약을 넣지 않고도 순식간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릴 수 있을 정도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는 표정 연기가 좋은 정치인이다. 요즘 TV로 정 후보의 표정을 보면 이전과 달리 과장된 표정을 거의 짓지 않는다. 전문가에게서 연기 지도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표정 연기도 요즘 들어 제법 배우스러워지고 있다.

바로 정치 상품들의 이런 말 돌리기와 표정 연기에 현혹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일반 상품과는 달리 대통령을 한 번 잘못 뽑아 놓으면 무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5년 동안 형편없는 불량상품을 울며 겨자 먹기로 쓸 수밖에 없다. 그러는 동안 나라는 거덜 나고 민생은 도탄에 빠진다. 그것이 바로 문제다. 다시는 말 돌리기 잘하고 표정 연기 좋다고 표를 찍어 스스로 실업자가 되거나 자식을 실업자로 만드는 일을 해서는 안 되겠다.

지금 우리는 모든 사람이 기자가 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일반 시민도 신문, 방송, 인터넷을 이용해 정보를 수집하고 의견을 확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자의 으뜸가는 직무는 주장에서 진실을 가려내고 그것을 시민에게 공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자가 되면 그런 전문 능력을 기르는 훈련을 받는다.

불량 정치상품 솎아 내야

마찬가지로 민주사회의 주인인 시민도 이제는 더 나은 정치 상품을 골라내는 일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스스로를 훈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선 대통령 후보들이 날마다 쏟아 놓는 주장과 공약 가운데서 무엇이 사실(fact)이고 허위인지, 또 무엇이 환심을 사기 위해 꾸민 것인지 냉정하게 따져 보는, 달리 말해 진실을 가려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불량 정치상품을 솎아 내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민웅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교수·언론학 minl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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