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승호]만발한 ‘갈등의 자유’

  • 입력 2007년 9월 26일 22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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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사령부 이전 및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해 경기 이천시 마장면과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 주민들이 반발하고 있다. 서울 노원구 공릉2동 주민들은 태릉성당 납골당 설치에 반대하며 추기경이 탄 차량에 달걀을 던졌다. 납골당 갈등은 이곳 이외에 인천, 경기 광명과 안산, 충남 아산에서도 일어났다. 경기 하남에서는 화장(火葬)시설 설치 문제로 시장에 대한 주민소환 절차가 진행 중이다.

이 밖에도 10여 개 지방자치단체에서 주민소환이 추진되고 있지만 제대로 진행되는 곳은 별로 없다. 대부분 ‘내 집 근처에 혐오시설은 안 된다’는 일부 주민의 님비 현상에서 비롯된 소환 움직임으로 명분이 약하기 때문이다. 7월 시행된 주민소환법이 석 달도 안 되는 기간에 오·남용 사례부터 쌓고 있는 것이다. 주민소환이란 단체장을 내쫓겠다는 것이니 국가 간에서라면 ‘전쟁’에 해당하는 최후의 갈등 해법이다. 이 모두 낮은 비용과 합리적 경로로 갈등을 푸는 훈련이 부족하고, 그런 절차나 장치도 부족해 빚어지는 일이다.

법원에 이혼을 청구한 후 3주일간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는 이혼 숙려(熟慮) 제도가 시행되자 이혼청구 취하율이 이 제도 시행 전의 이혼확정전 취하율보다 1.5∼4배로 높아졌다. ‘홧김 이혼’이 줄어든 것이다.

사회적 갈등 해소에서도 모범 사례가 있다. 방사성폐기물처분장 용지 선정이다. 전북 위도와 부안에서 격렬한 반핵 시위에 부닥쳤던 방폐장을 경북 경주는 흔쾌히 수용했다. 사실 정부가 경주에 지원키로 한 내용을 곰곰 따져 보면 부안의 경우보다 더 나을 게 없었다. 방폐장을 일방적으로 ‘떠안기는’ 것이 아니라, 유치 조건을 공개한 후 유치 희망 지역들에서 주민투표를 실시해 찬성률이 가장 높은 지역이 방폐장을 ‘획득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뿐이었다. 그러자 유치 경쟁이 시작됐고 경주는 89.5%의 찬성률로 방폐장을 따냈다. 시스템을 잘 디자인하면 19년 묵은 갈등도 이처럼 극적으로 풀린다.

강영진(갈등해결학) 성균관대 교수는 ‘반핵’ 등 드러난 주장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진정 원하는 이익에 초점을 맞추라고 조언한다. 새만금 사업도 ‘간척 대 갯벌보전’이라는 상반된 가치만 쳐다보면 해법이 없지만, 지역주민의 진정한 관심사는 지역 발전과 소득 증대라는 점에 눈을 돌리면 실마리가 잡힌다는 것이다.

주민소환에는 일부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소환청구를 할 수 없는 사항’을 정해 둘 필요가 있다. 선거 공약 이행이나 법정필수공익시설의 설치를 트집 잡아 시장이나 구청장을 소환하는 것은 금지해야 마땅하다. 재개발조합 등 이익단체나 지난번 선거의 낙선자, 즉 정치적 경쟁자가 소환을 발의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

툭하면 소환하겠다며 단체장을 압박하고 ‘달걀을 요리 이외의 용도에 사용하는’ 모습은 한국 사회의 갈등 완화 기능이 아직 걸음마 수준임을 뜻한다. 갈등을 완화하는 제도와 사회 분위기는 각종 의사결정 과정에서 우리가 지불해야 할 총비용을 낮춰 준다. ‘어떤 명(名)판결보다 화해가 낫다’는 법언(法諺)의 경제학적 함의도 바로 그것이다.

타협 문화와 갈등 완화 시스템은 도로,항만, 기술지식, 튼튼한 안보, 법치주의, 투명성, 시장경제와 같이 사회적 자본이며,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공공재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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