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옥자]권력병에 대한 단상

  • 입력 2007년 4월 20일 03시 00분


대학교 때 일이다. 서양사를 전공하겠다던 1년 선배가 연단에 나와 “역사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역사다”라고 소리치는 게 아닌가? 그 한마디는 지금까지 충격으로 남아 있다. 그 이후 인간을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이분하는 것이 과연 옳은 방법인지 늘 머릿속을 맴도는 화두가 되었다.

전통시대 동양에서의 정치는 권력과 지배의 차원이 아니었다. 특히 조선시대 지식인인 선비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기본으로 하여 사대부가 되었다. ‘수기’란 학문과 인격을 닦는 행위로 선비라면 누구나 당연히 거쳐야 한다. ‘치인’은 수기를 한 선비가 관료인 대부가 되어 남을 다스리는 행위다.

여기서 문제는 치인의 해석이다. 다스릴 치(治)자에는 가지런히 하다, 정리하다, 어지러운 사태를 수습하여 바로잡다 등 다양한 의미가 있다. ‘치료’ ‘치병’은 병을 보살펴 낫게 한다는 뜻이고 치산치수(治山治水)는 산과 물을 다스려 재해를 예방하는 토목공사를 뜻한다. 치란(治亂)은 난을 평정하여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며 치죄(治罪)는 죄를 밝혀 규찰한다는 뜻이다.

치국(治國)은 국가 사회 가정을 보살펴 관리한다는 뜻이니 치인은 오늘날의 개념으로 보면 남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과 가장 가깝다고 본다. 권력을 갖고 남을 지배한다는 뜻과는 거리가 먼데도 그렇게 해석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으니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권력병이 오염시키는 현상이다.

지식을 권력의 도구로 악용

어느 학술대회에서 있던 일이다. 조선 후기에 국가가 지식의 보급에 힘썼다는 대목에서 한 일본 학자가 “지식도 권력인데 국가가 일반 국민에게 지식, 즉 권력을 나누어 주었겠느냐?”고 반박하였다. 나는 “지식은 권력이 아닌데 지식을 권력의 도구로 악용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조선만큼 지식을 중요하게 여긴 나라도 드물다. 그래서 조선을 문치주의 국가라 했다. 문치의 전통이 없고 무를 숭상한 무사의 나라 일본의 학자다운 반응이 아닐까 싶은 한편, 지식의 권력화 문제가 대학에서 자행되고 있는 현실과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교수 중에는 권력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꽤 있다. 특히 대학원에서 지도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권력병을 앓고 있는 지도교수와 그 밑에서 도구화 내지 노예화되고 있는 학생의 질곡을 엿볼 수 있다.

도제교육적인 시스템에서 더욱 심각하다. 인문·사회계열의 도제교육은 자칫 학문적 아류를 확대재생산할 우려도 있어서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도 도제교육을 선호하는 교수가 있다. 의대나 공대 등 기술을 전수하는 교육에서 도제교육은 필수다. 기술뿐만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까지 지근거리에서 전수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부산물로는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상호보험의 의미까지 추가된다.

이 도제교육에서 지도교수가 권력병에 오염되어 힘을 남용하게 되면 그야말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전락하여 살벌한 생존경쟁의 싸움터가 되어 버린다. 교수는 제자의 에너지를 짜내 이용하려 혈안이 되고 제자는 사람에 따라 대응방식이 다르다. 그 지배 밑에 노예가 되거나, 반항하여 튀어 나가거나, 아니면 아파하다 망가지고 병이 난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제교육의 후유증은 집단이기주의를 낳고 밥그릇 싸움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

지배-피지배 만드는 도제교육

현재의 지도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고려시대 좌주-문생의 관계가 아니다. 좌주-문생 관계도 폐단이 늘면서 조선시대에 이미 폐기처분했다. 도제교육이 꼭 필요한 분야에선 그 순기능을 살리면 된다. 지도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대학의 학사 관계로 정리하면 된다고 본다.

결국 권력병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오염시키는 병균과 같은 존재다. 자신이 권력병에 걸렸다는 자각도 못한 채 힘을 남용하는 ‘권력 무자각증’ 환자도 많을 것 같다. 남을 지배하겠다는 저급한 욕망을 버리는 것만이 권력병에 걸리지 않는 길이다. 상호 존중의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이뤄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이 우리 사회엔 발붙이지 못하게 했으면 싶다.

정옥자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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