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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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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거짓 사이 줄타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할지 모르나, 예술가나 진지한 과학자는 곧잘 그런 고민에 빠지곤 한다. 재작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해럴드 핀터도 수상 연설에서 비슷한 내심을 밝혔다. “실재와 실재하지 않는 것, 진실과 거짓은 정확한 구분이 없다. 진실인 동시에 거짓일 수도 있다.” 모호하지만 통찰력이 엿보인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이 정말 멋지다. “나는 이 주장이 아직도 맞는 이야기이고, 예술을 통해 실재를 탐험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가로서는 이를 지지한다. 그러나 시민으로서는 지지할 수 없다. 시민으로서의 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최근에 드러난 조서 사태를 평가해야 한다. 현실 생활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서면(書面)은 철학적 의미를 함축한 인생의 조서가 아니다. 사실을 조사한 내용을 그대로 기록한 종잇조각일 뿐이다. 조서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재판에 쓰이는 것으로는 법원이 작성한 공판조서와 수사기관이 만든 신문조서가 대표적이다. 판사와 검사 이름의 조서는 모두 사실을 인정하는 증거가 된다. 거기에 창조적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수사와 재판의 결과는 개인의 일생을 좌우할 수 있다. 검찰과 법원이 국민의 신뢰를 얻으려면 사실을 정확히 밝히고, 그 사실에 대해 형평에 맞는 처분을 해야 한다. 사실이란 조서 형태로 기록된다. 개인이 겪은 미묘한 경험과 감정이 어우러져 종이 위에 활자화된다. 조서는 녹취록이 아니어서 어느 정도의 가공이 수반된다. 조서는 진실과 거짓 사이의 어디쯤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재판의 신뢰도는 우선 조서가 담은 진실의 양에 비례한다.
최근 조서가 연이어 말썽을 부리고 있다. 제이유그룹 사건을 수사하던 검사가 조서를 자신의 의도대로 꾸미기 위해 피의자를 협박하고 회유한 사실이 드러났다. 검사와 피의자의 문답 내용을 읽으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장면 하나에 과잉의 범인 필벌주의 사상, 관행주의와 편의주의, 권위주의가 모두 들어 있다. 검사의 조서가 얼마나 황당할 수 있는지를 모두가 알게 됐다. 그러고 보면 지난번 대법원장이 “수사 기록을 던져 버려라”고 한 말이 이해될 것이다. 대법원장의 수사학적 발언에 검찰이 발끈했던 이유는 제 발이 저렸기 때문일 수 있겠다.
관행과 권위의 가면 벗어야
법원이라고 정직한 것은 아니다. 바로 얼마 전 에버랜드 사건에서 검사와 피고인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재판장이 공소장을 변경한 사실이 보도됐다. 재판장의 변명은 오히려 잘못을 확실하게 보여 주는 증거가 됐다. 법으로 허용되지 않음에도 법원이 직권으로 공소장을 변경했다고 하는가 하면 검사와 변호인의 양해를 얻어 관행 차원에서 정리했다고 말을 바꿨다. 대법원은 법원과 소송 당사자 사이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탓이라고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버려야 할 관행과 매끄럽지 못했다는 의사소통의 차질이 고스란히 법원의 성실한 작문으로 조서에 남았다. 법원도 검찰 탓만 할 수 없게 됐다.
나름대로 사람 사이의 진실을 밝히겠다고 자신만만해하는 전문 직업인이 판사요, 검사다. 어제오늘 터진 조서의 관행과 현실은 한국 사회 진실의 순도를 흐리게 한다. 법률가는 예술을 이해하되 흉내 내서는 곤란하다. 판검사의 어설픈 예술 모방을 감시하기 위해, 시민으로서 우리는 고단할지라도 눈을 부릅떠야 하겠다.
차병직 변호사·참여연대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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