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정위용]푸틴이 연해주로 간 까닭

  • 입력 2007년 2월 1일 02시 59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7일 인도 방문을 마친 뒤 뉴델리에서 6726km 떨어진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했다. 연해주 청사가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출발점.

눈보라가 휘몰아쳐 헬기조차 뜨기 힘든 날씨 속에서도 대통령이 방문을 강행하자 다른 나라 정상과의 비밀 회담이 열릴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2002년 8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한 이후 최근까지 이 도시를 방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 푸틴 대통령이 만난 사람은 외국 정상이 아니라 세르게이 다르킨 연해주지사였다. 한국 일본 중국을 방문하며 외국인 투자 유치에 힘써 온 다르킨 주지사는 이날 ‘예산 벼락’을 맞았다. 푸틴 대통령은 “2012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 개최에 대비해 1000억 루블(약 3조5000억 원)을 연방정부에서 지원한다”고 약속했다. 연해주 1년 예산의 3배가 넘는 규모다.

푸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19세기 러시아 해군 장교가 보관했던 단검(短劍)을 선물로 받았다. 칼자루에 제정 러시아 황제의 훈장이 새겨진 이 칼은 러시아 태평양 함대가 1905년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군에 패한 뒤 한때 사라졌던 유물. 러시아군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사할린 섬 일본군 포로의 사물함에서 이 칼을 되찾아 연해주 청사에 보관을 의뢰했다.

다르킨 주지사가 태평양 함대의 유물을 선물로 고른 것은 이 지역에 대한 대통령의 깊은 관심 때문. 푸틴 대통령은 김 위원장을 만나러 왔을 때도 단검을 골똘히 쳐다보며 역사적 사실을 소상히 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러시아 언론은 ‘푸틴 대통령이 동북아시아에서 잃어버린 러시아의 영향력을 반드시 회복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러시아는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지난해까지 동북아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군사도시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도 사람의 발길이 줄어드는 오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지율이 70%를 넘는 푸틴 대통령이 극동지역에 관심을 쏟고 거점도시 성장 전략에 예산을 대폭 배정한 것이다. 러시아의 동북아 정책에는 돌풍이 곧 휘몰아칠 조짐이다.

우선 송유관 건설을 통해 에너지 헤게모니를 틀어쥐겠다는 계획에 외국인들의 시선이 쏠린다. 푸틴 대통령이 연해주를 방문한 날 러시아 최대 석유회사인 로스네프티는 나홋카 항에 대규모 정유시설을 짓고 아무르 강 연안의 정유시설도 증설하겠다고 발표했다.

나홋카 항과 아무르 강 연안은 4200km의 세계 최장 송유관이 가로지르는 지역. 러시아는 2012년 송유관 완공을 앞두고 극동으로 가는 석유를 어느 나라에 공급할지 저울질하고 있다.

사할린 섬에서 나오는 석유는 이미 설치된 송유관을 타고 연해주로 운송된다. 연해주에서 북한으로 수출되는 석유는 해마다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사할린의 천연가스는 내년부터 한국으로 수출된다.

극동지역에서 에너지 기반이 갖춰지면 철강 알루미늄 화학공업 등 대규모 에너지가 필요한 산업도 동반 성장시킨다는 것이 러시아의 복안이다.

이 같은 극동 프로젝트는 러시아를 동북아의 낙오자에서 이 지역 에너지정책 결정의 선도자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러시아가 이 프로젝트를 착착 실행하면 극동에서 중국을 견제하고 북한을 움직이는 지렛대 효과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가 이를 기반으로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면 한국이 ‘상전’으로 모셔야 할 나라가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 대한제국 말기의 상황이 재연될 것만 같아 마음이 무겁다.

정위용 모스크바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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