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서병훈]일류 국민이 일류 정치 만든다

  • 입력 2007년 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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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 병원 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병원 문에 들어서기 전부터 마음이 무겁다. 지잉 울리는 기계 소리만 들어도 주눅이 든다. 시큰거리고 찌르는 듯한 아픔이 겹치면 체면 불고하고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 진땀을 흘리며 온몸을 비틀다 보면 왜 굳이 찾아와서 이 고생인가 후회막급이다. “오늘은 그만 하고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말이 목구멍에서 맴돈다. 그러나 병은 고쳐야 한다. 필요하다면 수술해야 한다. 아프다고 피하면 더 비싼 값을 치를 수밖에 없다. 나라 살림도 다르지 않다. 플라톤이 의사를 정치인으로 비유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험악한 시대를 살아서 그런지 새 지도자에 대한 기대가 크다.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기필코 현명한 선택을 하고 말리라는 각오가 대단하다. 맞는 말이다. 온 국민을 질곡의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좋은 대통령을 뽑는 일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숭고한 의무와도 같다.

걱정도 된다. 지도자 대망론(待望論)이 정도 이상 과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아니다. 지리멸렬 대한민국을 다시 살리고 싶은가? 피다가 만 반쪽짜리 민주주의에 다시 원기를 불어넣고 싶은가? 그렇다면 대통령 한 사람이 우리 팔자를 고쳐 줄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슈퍼맨이라 하더라도 풀기 어려운 문제로 가득 찬 곳이 한국 사회다.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 교육 등 어느 하나 낙관할 것이 없다. 우리는 지금 중환(重患)을 앓고 있다.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 떨치고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고 싶은가? 그러면 지금 당장 병원 문을 두드려야 한다. 병이 깊은 만큼 고통이 크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과감하게 수술대로 올라가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허황된 청사진에 넋을 놓을 때가 아니다. 지도자가 해 주기를 기다릴 때는 더구나 아니다.

맹자(孟子)는 화(禍)와 복은 모두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했다. 순자(荀子)는 자기 속에 없는 것을 바깥에서 구하려 하는 어리석음을 질타했다. 단언하지만, 국민이 일류가 되어야 정치도 일류가 될 수 있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집기도 한다. 배를 뒤집어서야 되겠는가. 정치인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국민이 도와줘야 한다. 고통 분담을 외면하고 지도자 타령만 하는 한, 대한민국에 희망은 없다.

민주국가에서 국민이 자기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권리뿐만 아니라 빚도 안고 가야 진정한 주인이다. 나랏일을 곧 자기 일로 생각해야 민주국가의 참된 주인이라 할 수 있다. 나라가 가라앉을 판인데 제 몫만 챙기겠다는 것은 이방인이나 뜨내기가 할 일이다. 난파 위기에서 빠져나오려면 배의 화물을 바다로 던져야 한다. 나를 버리고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골목길에서 마주친 차 두 대 때문에 온 동네가 시끄럽다. 누군가는 양보해야 문제가 풀린다. 그런데 “왜 하필 내가?”만 되풀이한다. 혐오시설을 기피하느라 전국이 들끓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아픔을 둘러싸고 집단 이익이 첨예하게 엇갈린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기 이익만 찾으려 든다. 그러면서 모두를 원망한다. 아무도 행복할 수 없는 이런 딜레마를 일컬어 ‘민주주의의 자살’이라고 했던가? 내가 먼저 희생하겠다는 결의가 전제돼야 대한민국을 구할 수 있다. 진짜 국민이 되는 길을 고민해 보자. 그래야 위기를 넘어갈 수 있다.

내가 먼저 희생한다 각오로

우리 동네 치과 의사는 참 좋은 양반이다. 무엇보다 “아파도 참으셔야 합니다”라는 말이 정말 믿음직하다. 칼을 들이대고 피를 보아야 하는 상황에서 달콤한 말로 환자에게 영합하는 모습은 의사가 할 일이 아니다. 지금이 어느 상황인데, 남북정상회담이니 병역복무기간 단축 따위의 선심 공약을 늘어놓는가. 국민을 어떻게 보기에 선거를 앞두고 그런 놀음을 할 수 있는가. ‘악하고 게으른 종’이 국민까지 모독하려 드니 죄가 실로 무겁다. 고통을 자청(自請)하고 나선 국민인데 엉터리 정치인들 쓸어버리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 아닐까.

서병훈 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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