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은령]‘시다’의 꿈

  • 입력 2006년 12월 26일 02시 56분


하청 받은 일거리로 미싱을 돌리는 작은 공장들과 곱창집, 24시간 편의점, 뉴타운 분양권 광고가 빼곡히 붙은 부동산 중개업소를 지났다. 밤인데도 어딘가로 서둘러 달려가는 택배기사들의 오토바이가 사람들 사이를 곡예하듯 헤쳐 나가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 골목길.

동대문시장, 평화시장에 내걸리는 옷들을 만드는 작은 하청업체들이 있는 이 골목길을 걸어 ‘수다공방’에 도착했을 때 공방 사람 두엇은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프레스가 얼마나 중요한데. 이런 주먹구구로는 안 돼.”

“아, 하이패션(고급 기성복)들도 다 이렇게 한다니까요.”

“하이패션이 그런다고 우리도 그렇게 해? 우린 테크닉이 더 필요해.”

“하하하. 나 참 죽겠구먼.”

흰색과 녹색으로 마감된 공방 안 풍경은 재봉틀과 천, 실 꾸러미들이 아니었다면 거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아늑했다.

‘수다공방’ 사람들은 12월 1일 자신들이 만든 옷으로 패션쇼를 벌였다. 민주노총은 총파업 투쟁 중이었고 3년을 끌어 온 노사정 로드맵은 막판 국회를 통과하더라도 불씨로 남을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거듭되던 때, 청계천 미싱사로 20∼30년을 보낸 중년 여성들이 공방에서 새로 기술 교육을 받고 패션쇼까지 벌인다는 것은 좀 낯선 소식이었다.

“노동운동 한편에서는 개량주의라고 비판도 하겠죠. 하지만 우린 그동안 너무 많은 담론을 얘기해 왔어요. 지금 필요한 건 뭔가 조그만 것이라도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겁니다.”

‘수다공방’의 모태인 ㅱ여성노동복지터 전순옥 대표는 탁자를 두고 마주앉아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오빠 전태일처럼 그도 옷 만드는 노동자였다. 1971∼76년 부평수출공장 등에서 실밥 뜯기 등의 허드렛일을 하는 ‘시다’와 최종품 검사를 했지만 시다의 ‘꿈’인 미싱대에는 앉지 못했다.

2001년 영국에서 ‘의류산업에서의 노동자들의 투쟁’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12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강단이 아니라 영세한 의류 하청공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밖에서 보면 경제적으로 많이 잘살게 된 것 같은데, 도대체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어요.”

그러나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변화가 아니라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여전히 1980년대 중반 수준에 멈춰 있는 기술. 청계천 노동자들은 질 높은 기술로 자기 가치를 높이지 못하고 작업 시간을 늘려 임금을 더 받고 그 돈으로 더 큰 냉장고, 더 큰 TV를 샀다. ‘귀족 노조’라고 비난받는 대기업 노동자들도 임금인상분으로 더 많은 소비를 향해 내달릴 뿐 삶의 질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더 많이 일하게 하고 더 많이 소비하게 하는 게 세계화입니다. 많이 버는 사람이나 적게 버는 사람이나 그 스트레스가 다를 수 없어요. 지금의 노동운동이 해야 할 새로운 일은 삶의 철학을 바꾸는 겁니다.”

‘수다공방’ 사람들의 꿈은 누구도 쉽게 대신하지 못할 고급 기술로 하루 8시간만 일하고도 오래 아껴 입을 수 있는 값진 옷을 만드는 것이다. 돈으로 삶을 향상시키는 게 아니라 적게 벌고 적게 소비하며 생각할 시간을 갖고 삶을 바꿔 나가겠다는 것이다.

그 꿈이 개량주의인지, 몽상인지, 아니면 현재를 뿌리부터 바꾸는 진정한 ‘급진’인지를 헤아려 보기엔 내게도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정은령 사회부 차장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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