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한기흥]‘애국심’이 촌스러운 세상

  • 입력 2006년 11월 29일 20시 45분


국위(國威)를 떨치는 나라치고 국민의 애국심이 약한 경우가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국민이 나라를 제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국난을 극복하고, 국가의 존엄을 높일 수 있다. 우리가 숱한 어려움을 겪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한 것도 남다른 애국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에선 지도자들이 말과 행동으로 국민의 애국심을 북돋우는 것을 보기 어려워졌다.

대한민국이 걸어온 길을 회의적으로 보는 세력이 집권한 데 따른 부작용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 중국의 지도자들이 자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볼 때, 월드컵 축구경기가 열릴 때나 애국심을 느끼는 요즘 우리 세태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지금 교육기본법에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고 이를 육성해 온 우리나라와 향토를 사랑한다’는 문구를 넣는 문제로 시끄럽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은 당초 ‘애국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다 야당이 반발하자 개정 법안의 표현을 완화했다. 그래도 야당은 군국주의 교육으로의 회귀를 우려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가사키 현 사세보 시가 6월 말 애국심을 기본 이념으로 하는 아동육성 조례를 처음 제정하는 등 애국심 교육은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올해 ‘8대 영광과 8대 수치(바룽바츠·八榮八恥)’라는 7언 율시를 통해 ‘조국을 사랑하는 것과 조국에 해를 끼치는 것(熱愛祖國 危害祖國)’을 첫 번째 영광과 첫 번째 수치로 꼽았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10년도 더 된 허름한 잠바와 2년 전에 꿰맨 낡은 신발 차림으로 농촌을 누벼 13억 중국인의 심금을 울렸다. 이런 지도자가 애국심을 북돋운다.

딱한 것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우리다. 청와대 홈페이지를 보자.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을 검색해 보면 현충일, 국군의 날 등에 ‘애국선열’에 관해 의례적으로 언급한 것 말고 진지하게 애국심을 장려한 발언은 찾기 어렵다. 9월 MBC ‘100분 토론’에서 “과거 독재에 찬성했던 사람들만이, 자기들만이 애국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오만이야말로 한국의 장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 대통령의 발언은 그래서 더욱 희한하게 들렸다.

문제는 학교에서도 나라 사랑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공립학교에 다니던 필자의 아이들은 매일 수업 시작 전에 성조기 앞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The Pledge of Allegiance)’를 해야 했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온 뒤로는 학교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는 것은 물론이고 애국가를 부르는 일도 별로 없다. “성적 외에 애국심에 관해 말씀하시는 선생님을 뵌 적이 없다”는 아이들의 얘기가 과장일까. 중고교 시절 선생님들은 우리가 사고를 칠 때마다 “너희 같은 놈들에게 어떻게 조국을 맡기겠느냐”고 꾸짖으시곤 했다. 이제는 전설이 된 얘기들이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한 야당 중진 의원은 “지금은 애국심을 말하는 게 촌스러운 세상”이라고 개탄했다. 대한민국이 왜 이렇게 됐는가. 내우외환으로 편할 날이 없지만 그럴수록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선열들이 피로써 지킨 대한민국의 지금 사정이 너무 위태롭지 않은가.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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